그리고 아무도 없었을까? 결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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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을까? 결말 #3

릴레이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을까?

천리안 추리문학동호회 회원들

 
  •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에게 초대장을 받은 7명의 남녀들.
  • 이들은 초대장의 글에 이끌려 별장만 떨렁 있는 무인도로 모여든다.
  • 그리고, 계속 되어지는 살인과 공포.
  • 범인은 7명중의 하나라는 것 밖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다.
  • 누가 연쇄 살인의 범인인가? 그리고 다음 희생자는? 또한 범인은 무슨 목적으로 살인을 계속 하는 것인가?
  • "그리고 아무도 없었을까?" 는 1998년 천리안 추리문학동호회에서 진행되었던 릴레이 소설입니다.
  • 릴레이 규칙 : 1인당 10 문장씩 스토리를 이어서 릴레이 합니다.
  • 일정 횟수까지 진행되면 릴레이는 끝이 나고, 참여자는 기존 글을 토대로 결말을 낼 수 있습니다.
  • 릴레이가 종료되었기에 문장을 좀 더 매끄럽게 수정하고, 결말까지 정리하여 올립니다. <1998-10-25>
 
  [결말] 6. 루 이야기
 
  바이올린, 피아노, 주산, 컴퓨터, 속기, 웅변, 미술 등등.
  어린 시절의 일을 더듬을 때면 기억나는 것이라곤 그런 것들 뿐이었다. 소꿉놀이를 하던 추억이나 친구와 손을 잡고 거리를 배회하던 기억이나 의견 충돌로 인해 말다툼을 한 과거 따윈 전혀 없다. 그저 부모가 시키는 일에 묵묵히 한 기억 밖에는 없다.
 
  반항심은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 반항심을 쉽게 드러낼 순 없었다. 들어낼라치면 어김없이 날카로운 시선과 실망했다는 표정이 곧바로 시야에 들어온다. 부모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기대했음이 틀림없고, 루는 그러한 부모의 기대에 실망을 안겨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묵묵히 하라는 대로 모든 일을 순한 양처럼 했었다.
 
  부모끼리의 다툼은 익숙한 상태였다. 서로 열을 올리며 치고 받곤 하지만 그건 어른들의 일이므로 자신이 참견할 사항이 아니라 생각했다. 싸움이 끝난 후에는 어머니나 아버진 진열대에 있는 양주를 벌컥 벌컥 들이키곤 했다. 마시고 난 뒤엔 더 큰소리로 싸우거나 얌전히 골아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술이란 어떤 맛일까? 란 의문은 언제나 가지고 있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독히도 싫어하던 영어를 배워야 한다면 영어 학원 수강을 강요받던 날 -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하지 못하던 날 루는 술이란 걸 마셔보기로 결심했다.
 
  첫 맛은 썼다. 지독하게 썼다. 이런 걸 뭐 좋다고 마시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독한 맛이었다. 그래도 좋은 점이 있으니 어른들이 자주 마실 것이라는 생각에 좀더 마셔보았다. 하지만 쓰다는 것 외에 다른 맛은 없었다. 실망이었다. 그만 마시고 학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어찔함이 밀려왔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팔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몸이 멋대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온 부모는 술에 취해 널브러진 그녀와 엉망이 된 집안을 목격할 수 있었다. 깨지는 물건은 죄다 깨져있었고, 부서질 수 있는 건 모조지 부서져 있었다. 내면에 쌓이고 쌓였던 스트레스만큼 모든 것이 박살나 있었다.
 
  루의 그 행동 때문에 부모는 또다시 싸웠다. 자식을 제대로 간수 못한 죄를 서로에게 뒤집어씌우며 치열한 전쟁터를 만들었다. 루는 이상하게 그러한 상황을 만족해했다. 그때의 그녀 나이는 고작 12살이었다.
 
  쌓였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을 터득한 그녀는 주기적으로 말썽을 피웠다. 술은 언제나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술의 힘을 빌어 쌓인 스트레스를 모조리 풀고 나면 집안은 강도라도 든냥 개판으로 변했다. 부모는 술 주정하는 그녀에게 뭐라 하질 못했다. 사나운 야생 짐승처럼 그녀가 날뛰는 통에 말리거나 피하기 급급했던 것이다. 술이 깨면 그녀는 원래의 얌전한 소녀로 돌아왔기에 부모는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못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술 없이도 객기 부리는 법을 터득했다. 스트레스가 쌓였다 싶으면 스스로 다른 인격을 불러내어 한바탕 소동을 피웠다. 소리도 지르고, 욕설도 내뱉고,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고 나면 개운한 마음으로 원래의 생활을 다시 할 수 있었다.
 
  스스로 도플갱어임을 인정하고 그러한 자신에게 만족했다. 평소엔 순종적인 착한 여학생으로, 스트레스가 극도로 찼을 땐 폭력적이며 거친 불량배로 행동했다. 그녀는 그러한 자신이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자신에게 있어 그런 행동은 지극히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부모는 그렇지 못했다. 부모를 비롯한 친척들은 그녀를 정신병자 취급했고, 급기야는 병원이라는 감옥에 처넣으려고까지 했다. 언제나 순종적이었던 그녀는 그들의 기대에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인격을 불러내어 그들을 심판했다. 그 결과는 그녀로 추방을 당해야 했다.
 
  불만은 없었다. 갑갑한 집보다는 타지 생활이 훨씬 좋았다. 억압됨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택해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 방법에 대해선 몰랐다. 때문에 도플갱어의 삶은 그대로였다.
 
  야간학교에 전학했을 때 주위의 눈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그녀의 배경에 추동 기업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은 가난이란 열등감에 사로잡힌 그들을 자극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결과는 항상 루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 루는 그러한 것들을 차곡차곡 내면에 쌓아 두었고, 일정한 양이 찼다 싶으면 다른 인격을 등장시켜 한순간에 풀어버렸다.
 
  동창이기도 한 수가 일부러 접근하기 시작하자 처음엔 영문을 몰라했다. 수는 루란 존재를 무시하던 부류에 속했었기 때문이다. 한참 뒤에야 자신의 재산에 욕심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그것은 수의 생각일 뿐이므로 루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친해지고 있다는 감정은 기분을 좋게 했다.
 
  대학을 같이 다니게 되었고, 자취방도 같이 쓰게 되면서 좀더 친한 사이가 되었다. 평소 때의 얌전한 루는 수를 좋아했다. 그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는지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수는 루에게 잘해줬고, 그것이 좋을 뿐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루는 조금 못 마땅한 모양이다. 가끔 수를 곤란에 빠뜨리는 행동을 저질렀다. 그걸 군말 없이 일일이 수습하는 수를 볼라치면 장난기가 발동해 더 큰일을 저지르려 한다.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과연 어느 정도까지 침착하게 뒤처리를 하는지 지켜보고 싶어졌다. 그래서인지 또 다른 인격의 루가 저지르는 과격함은 날로 더해 갔다.
 
  앵크라는 깡패를 건드린 것은 수에게 크나큰 타격을 준 듯 했다. 그의 형이 길길이 날뛰며 합의금 명목으로 거금을 요구해 왔던 것이다. 루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과연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할 것인지 자뭇 궁금했다.
 
  수는 인내심이 강한 여자였다. 전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뒤처리에 나섰다. 하지만 루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평소에도 거금은 아니지만 약간의 공금을 빼돌리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거금인 만큼 표가 나지 않을 순 없다. 그냥 둔다면 표가 날 것이다. 허나 들통나기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고, 그 사이에 다른 자금으로 메우면 된다. 서류 상으론 구멍난 자금은 이동하게 되어있으니 들킨 일은 없다. 그리하여 수단 좋은 수는 완벽하게 거금을 빼어낼 수 있었다. 적어도 루가 수의 직장에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정체를 밝히지 않은 여자의 밀고를 받은 업체 측은 반신반의하면서 자체적으로 수사에 나섰고, 수의 공금 횡령이 발각되고 말았다. 그녀가 경찰로 넘어가자 루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까지 몰아세웠는데도 과연 참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수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었다. 그녀가 폭발한다면 계속 되어온 이 게임은 루의 승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수는 무협의로 풀려나고 말았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네로란 존재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네로가 수에게 접근하고 있고,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저를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네로가 이번에는 루에게 접근해 왔다.
  “무슨 말씀이죠?”
  “당신에 대해서 알아봤죠. 뜻밖에도 나와 차원은 틀리지만 공통적인 것을 원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당신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네요. 이만 실례할게요.”
  “수 님을 괴롭히고 싶지 않나요?”
  루는 네로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죠? 그게 무슨 뜻이에요? 수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
 
  갑자기 다른 인격의 루가 등장했다.
  “무엇을 원하죠?”
  네로가 미소를 지었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그저 제가 지시하는 데로 행동만 해 주면 됩니다. 그러면 수 님은 평소의 완고함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일 겁니다. 당신도 그 모습을 보고싶죠?”
 
  네로는 자신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그것이 전부일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수를 괴롭히는 일임에는 틀림없는 듯 했다. 다른 인격은 네로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네로의 첫 번째 부탁은 꾸며진 강간 사건의 목격자가 되어, 그것을 빌미로 핼리에게 섬으로의 여행을 강요하는 역할이었다. 또한 섬에서 핼리가 해야할 일을 지시하는 몫도 수행해야 했다. 루는 불만 없이 네로가 지시한 내용을 모두 이행했다.
 
  두 번째 부탁은 레븐스와의 사귐이었다. 뜻밖의 부탁이긴 했지만, 그 역시 시나리오에 참여할 인물이고, 섬으로 끌어들일 미끼가 필요하다는 네로의 설명에 그가 원하는 데로 해 주었다.
 
  레븐스와는 우연히 만난 듯 가장하여 가짜 사랑을 했다. 순진한 것인지 미련한 것인지 레븐스는 쉽게 루를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깊이가 되자 루는 자연스럽게 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나... 협박을 받고 있어요.”
  “협박? 무슨 협박? 자세히 이야기 해봐!”
  “조만간 무인도에 있는 별장에 가야 해요. 그곳에 가야만 한다고 어떤 사람이 협박을 하고 있어요. 예전에 그에게 빚진 것이 있거든요.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어쩌면 날 죽일지도 몰라요.”
 
  “빚이라니? 내가 대신 갚아줄게!”
  “돈 같은 게 아니에요. 아직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어요. 나중에 다 이야기 해 줄게요. 그보다 그 섬에 당신도 같이 가 줬으면 해요. 당신이 옆에 있어주면 마음이 놓일 거예요. 물론 그래 주시겠죠?”
 
  “걱정하지마. 언제나 네 곁에 있어 줄 테니.”
  이로서 레븐스 포획은 성공한 셈이었다. 네로가 지시한 데로 하루 늦게 레븐스가 도착하도록 손을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로는 흐뭇해하는 듯 했지만 루는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시키는 네로에게 불만이 쌓였던 것이다. 싫어도 억지로 해야만 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은 자발적인 것도 어느 정도 있긴 하지만 강요라는 점에선 공통점이 있었다. 루는 수니에게 늘 느끼고 있던 그 무엇을 네로에게서도 느꼈다.
 
  “며칠 동안 조용한 섬에 가 있자. 머리도 식힐 겸 말이야.”
  수의 말에 루는 가고 싶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너 혼자 가면 안돼? 난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안돼! 너도 같이 가야돼.”
  루는 수의 말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감정을 발견했다. 그것은 여태껏 수가 보이지 않았던 뜻밖의 감정, 즉 분노였다. 수의 마지막 말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루는 흠칫했다.
 
  “알았어. 그럼 갈게.”
  루의 또 다른 인격이 대답했다.
  루 자신은 거부했지만 다른 인격은 수의 살기를 즐거운 듯 받아들였다. 게다가 섬에서 벌어질 일을 상상하며 무엇이 좋은지 미소를 짓기도 했다. 루는 그러한 다른 인격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섬으로의 여행은 루에게 조여오는 공포를 제공했다. 잠잠해진 다른 인격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평상시의 조용한 루는 섬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는 압박 때문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섬에 도착하고 2층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던 루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부엌에서 쥐를 보고 기절까지 하는 소동까지 벌이고 말았다.
 
  “무섭니?”
  수의 음성은 걱정하는 투를 가장한 새디즘이었다.
  “아... 아냐. 그냥 좀 놀라서...”
  “곧 괜찮아 질 거야. 너무 걱정하지마.”
  “이곳에 더 있기 싫어. 그냥 돌아가자, 응?”
  수는 루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내가 당한 만큼 너도 당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듯 했다. 루는 그러한 수의 눈빛이 싫어 고개를 외면하고 만다.
 
  “섬에서 그만 나가고 싶어요.”
  네로를 찾은 루는 용건을 간단히 말한다. 네로는 비웃었다.
  “벌써? 아직 연극은 시작도 안 했는데요? 조금 더 있으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을 텐데도?”
 
  “그건 내가 원한 게 아니에요!”
  그제야 네로는 루의 다른 인격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응? 어떻게 된 거지? 이쯤이면 다른 인격이 나타날텐데...”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걸요. 더 이상 다른 인격은 당신 앞에 안 나타날 거예요. 난 이게 싫어요! 그래서 막았어요!”
 
  “이런...”
  네로는 혀를 찼다. 그는 계획이 루로 인해 틀어지고 있음을 인지한 것이다. 그가 말했다.
 
  “하는 수 없군요. 그럼 섬에서 나가도록 하죠.”
  “정말이죠?”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또 다른 당신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억제를 하고 있다면 더 있을 필요가 없지요.”
 
  “고마워요.”
  “정말 다른 인격과는 차이가 많군요. 어쩜 그렇게 순진할 수가...”
 
  “네?”
  루가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네로는 준비해 놓은 물품 중 하나인 마취제를 이용하여 루를 잠재웠다.
 
  “계획이 틀어지면 안되지. 암, 안되고 말고.”
  네로는 애초의 계획대로 루를 목맨 시체로 위장을 했고,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그 후에 시체 - 마취된 루는 그녀의 방으로 옮겨졌다.
 
  루가 깨어난 건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다.
  조용히 눈을 뜨고 뻐근한 몸을 가누고 있을 때, 느닷없이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수였다.
 
  “수?”
  “이제서야 깨어난 모양이군. 이제 결말을 내자!”
  “무... 무슨 말이야, 그게?”
  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몰라서 물어! 그 동안 조금씩 나를 괴롭혀 왔지? 너로 인해 내가 받은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 또 다른 인격? 넌 억제된 스트레스를 다른 인격을 통해 해소를 하지? 하지만 난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계속 쌓아두기만 했어. 더 이상 나도 참을 수 없다고!”
 
  수는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꺼내 루에게로 달려들었다. 칼날이 루의 배를 찌르려는 순간 루의 손이 그 칼을 쥔 수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엄청난 힘이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루의 얼굴을 쳐다보는 수의 얼굴에 거친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녀가 쥐었던 칼은 어느새 루의 손으로 옮겨져 갔다. 그리고 칼날은 어김없이 수의 배 살을 가르고 내장을 후비고 있었다.
 
  “후후. 나로 인해 피해를 많이 봤다고? 넌 불순한 동기로 나와 친해진 것인 아니었니? 그 대가라고 생각해야지.”
 
  사악한 미소를 짓는 건 다른 인격의 루였다.
  그녀는 죽어 가는 수를 내려다보면 승리의 쾌감을 음미했다. 루 앞에선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는 수가 발끈하여 달려들었다. 끝까지 고수하던 인내심을 무너뜨리고 칼을 들이밀었다. 그녀를 굴복시킨 것이다. 그녀의 도도함을 허물어뜨린 것이다. 루는 승리감에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조금씩 삭으러 들고 표정은 바뀌었다. 어느새 그녀는 글썽이는 표정으로 바뀌고 말았다.
 
  “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수? 정신차려, 수! 제발, 제발 눈을 떠, 수! 으악! 안돼! 널 내가 죽이다니, 이건 아냐, 아니라고! 아냐!”
 
  오열이 밀려오면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수의 시체를 부여잡고 통곡을 한 루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널 이렇게 만든 건 그 녀석 때문이야! 내가... 내가 복수하고 말겠어! 모두다 죽여 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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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 사이로 다시 등장하자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들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자 영문을 몰라하며 의욕과 공포를 느끼는 듯 했다. 루는 네로가 전에 지시했던 데로 일란성 쌍둥이를 운운하며 분위기를 조정했다.
 
  사람들 중에는 레븐스도 끼어 있었다. 마취되어 있는 사이에 도착한 모양이다. 일단은 네로의 시나리오대로 모르는 척 했다.
 
  힐끔 네로를 살펴보니 그는 연극을 계획한 데로 진행되는 것에 만족을 하는 눈치였다. 루는 속으로 비웃으며 그의 계획을 틀어버릴 또 다른 시나리오를 세워 나갔다. 수의 복수를 위해, 그가 세운 공포의 무대에 그를 포함시킬 것이다. 사람들이 그가 계획한 시나리오에 의해 공포를 느끼듯 그 역시 틀어지는 시나리오에 의해 공포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네로의 시나리오를 좀더 진행시킬 필요가 있었다.
 
  핼리를 만나 네로가 지시한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주문한대로 멋진 탐정 역을 소화해 냈다.
 
  돌 섬에서 봄비와 함께 사라진 것도 네로의 시나리오 그대로였다. 봄비를 마취시킨 뒤 좀 지난 후에 내보냄으로서 그녀에게 초점이 맞춰지려는 수작일 것이다.
 
  이쯤에서 루는 레븐스를 만났다.
  “미안해요, 제가 죽은 줄 알고 많이 놀라셨죠?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죽었다는 걸 그들이 믿어야 했거든요. 그래서 연극을 한 거죠. 다시 등장한 저와 핼리 님의 추리로 인해 그들은 많은 혼란을 겪었을 거예요. 핼리 님은 저를 도와주고 있는 분이죠. 그는 제 편이에요. 그들은 제가 죽었다는 걸 의심하고 있지만 조만간 믿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저를 단념하겠죠.”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 그런데 내가 너의 약혼자라는 걸 이미 말해 버렸는데...”
 
  “상관없어요. 그들이 원하는 건 저지 당신이 아니거든요. 당신에게 해를 입히진 않을 거예요. 당분간 저는 숨어 있어야 해요. 그러니 섬에 있는 동안은 저를 찾지는 마세요. 그리고 혹시 누가 저에 대해서 물어보면 2년 전 정신병원에서 만난 사이로 해 주세요. 아시겠죠? 그리고, 죄송해요. 이상한 상황에 당신까지 끌고 와서요. 나중에 다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난 너를 믿으니까.”
  “고마워요.”
  루는 그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더한 뒤 그와 헤어졌다.
  이제 한 일은 본격적으로 네로의 시나리오를 끊어버리는 행동이었다. 그 첫 타겟으로 핼리를 설정했다.
 
  핼리는 아직 네로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를 섬으로 끌어들인 것은 루였으니 말이다. 그는 아직도 루를 협박범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우선 핼리를 먼저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레븐스가 핼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물을지도 모른다는 위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현재 네로의 시나리오를 추진시키는 인물이 핼리였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를 제거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별장의 지하실로 유인한 뒤 핼리를 죽였다. 두 번째 살인이므로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다른 인격의 루는 살인이라는 것에 쉽게 적응한 듯 싶다.
 
  “꼬마에겐 미안하지만 수의 복수를 위해서니 어쩔 수 없어. 이로써 네로의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한 거야.”
 
  효과는 확실했다.
  핼리의 시체를 발견한 네로는 당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나리오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변경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의 행방불명은 커다란 차질이 주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네로는 수가 루의 손에 의해 죽었다는 걸 모르고 있다. 수는 분명 네로의 시나리오에 큰 역할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의 시나리오 속 캐릭터들은 하나씩 사라지고 결국 그 혼자만이 이 섬에 덩그러이 남게될 것이다.
 
  지마를 죽였다. 그 덩치 큰 남자는 살인자의 섬에 갇힌 공포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공포에 저린 남자를 죽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벌써 세 번째의 살인이 아닌가? 능숙해질 때도 되었다.
 
  수 또는 루가 범인이라고 네로는 짐작한 모양이다. 그는 남은 사람들을 부추겨 섬을 샅샅이 뒤지는 듯 했다. 하지만 안전한 곳에 시체들과 함께 있는 그녀를 찾지는 못할 것이다.
 
  조만간 시체가 모두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섬 뒤쪽 구석진 곳에 네로가 숨겨놓은 통통배 - 지마 선장의 배 - 가 없어진 것도 발견하게 되겠지. 그 배는 시동을 건 채 망망대해로 떠내려보냈다. 최후의 탈출구가 사라진 셈이다.
 
  루가 놀란 것은 시나리오가 많이 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시나리오를 유지하려는 네로의 태도였다. 그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끝까지 정체를 들어내지 않고 시나리오 적인 행동을 유지했다. 충분히 세운 계획이니 만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시체가 사라진 것과 배가 없어진 것, 그리고 해변가에 놓아두었던 봄비가 발견되었다. 봄비는 수가 핼리를 협박했다고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루가 핼리를 만날 때는 수 모습을 흉내 내었기 때문이다. 봄비의 등장으로 인해 네로의 시나리오가 다시 진행되는 듯 했다.
 
  그쯤에서 네로 방에 시체들을 널어놓았다. 시체를 모두 옮길 필요는 없었다. 애초부터 시체들은 네로의 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옷장과 침대 밑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낸 정도로 작업은 쉽게 끝났다. 별장을 뒤진다 해도 자신의 방은 꼼꼼히 뒤지지 않을 테니 그야말로 안전지대일 수밖에 없다.
 
  시체들 속에 수를 포함시킨 것은 크나큰 파문을 일으켰다. 애초 네로의 시나리오 포함된 것인지 어떤지를 모르지만 내분 비슷한 분위기로 변하였고, 마침내는 신경전까지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네로가 총을 소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분위기는 수그러들었다. 허나 루는 네로가 권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권총은 루의 손에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던 중에 봄비가 울음을 터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가끔 히스테리 컬하게 변하는 그녀를 네로가 자극한 탓이다. 요일이 그녀를 달랬고, 식사 후에는 응접실에 모여 각자 나름대로의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마음을 진정시킨 봄비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모두에게 커피를 대접했다.
 
  “맞다!” 갑자기 생각난 듯 요일이 말했다.
  “핼리와 지마 님이 남긴 다잉 메시지 말입니다, 우린 그걸 아직 풀지 못했어요. 여러 가지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금 다시 생각을 정리해 봤죠.”
 
  네로를 비롯해 봄비, 레븐스는 요일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요일은 자신의 추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선 핼리는 ‘그 여인 죽’이란 메시질 남겼죠. 이건 ‘그 여인이 나를 죽였다’라고 풀이가 가능합니다. 또한 지마 님이 남긴 ‘X’라는 표시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죠. 하나는 핼리를 죽인 범인이 여자가 아니라는 뜻이고, 하나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실들이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그건...” 레븐스가 말했다.
  “전에 이야기했던 내용이잖아요?”
  “맞아요. 거기까지만 이야길 했었죠. 하지만 가장 의문이 드는 건 핼리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핼리는 저항하지 않은 상태에서 복부에 칼이 찔렸어요. 그렇다는 건 아는 사람에게 당했다는 뜻이겠죠? 범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만일 제가 그 상황이었다면 ‘그 여인이 나를 죽었다’라는 긴 문장보다는 범인의 이름을 간단하게 썼을 겁니다.”
 
  “그렇다는 건...” 레븐스가 입을 열었다.
  “핼리 님의 다잉 메시지가 거짓이라는 건가요?”
  요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범인을 알고 있는데 ‘여인’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쓰진 않았을 겁니다. 즉, 핼리의 다잉 메시지는 범인이 조작한 것이 틀림없어요. 그렇다면 지마 님이 남긴 ‘X’의 뜻은 ‘여자가 아니다’일 가능성이 높죠.”
 
  그럴싸한 해석이었다. 2층 난간에서 밑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는 미소를 지었다. 문뜩 생각나서 즉흥적으로 해 놓은 것을 요일은 깊이 있게 추리한 것이다. 물론 틀린 결과이긴 하지만.
 
  레븐스가 입을 열었다.
  “애초부터 우린 수 님을 의심했죠. 하지만 수 님마저 살해를 당했습니다. 범인은 수 님이 아니란 이야기겠죠. 범인이 남자라면 결국 남아 있는 남자! 역시 당신 밖에 없어!”
 
  레븐스의 시선은 네로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은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작살을 내겠다는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네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남자가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레븐스가 사납게 말했다.
  “물론 내가 범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난 당신을 범인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훗. 내가 권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잊은 모양이로군. 내가 범인이었다면 권총을 왜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지금이라도 당장 쏴 버릴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엉뚱한 상상은 금하도록 합시다. 신경이 날카로워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네로는 소파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가 아파서 이만 쉬어야겠군요.”
  네로는 궁지에 몰린 생쥐 같은 심정이었다. 자신이 구상한 시나리오엔 이 따위 설정은 없었다.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지금쯤 공포에 찌든 인간들이 서로를 의심하며 살인도 불사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짖는 네로가 원래의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은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해답은 루만이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이 모든 게 잘못된 건 그녀의 소행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빌어먹을.’
  네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누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그러한 네로를 보며 루는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행동을 취하기 위해 그들 앞에 모습을 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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