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3 저승길에서 만난 사람들

> 자작소설 > 영혼

Act.3 저승길에서 만난 사람들

  Act.3 저승길에서 만난 사람들
 
  영호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잠깐동안이지만 머리가 몽롱했다. 마치 잠에서 막 깨어난 그런 기분이었다.
 
  서서히 정신을 차리면서 이곳이 어디인가 의문을 품었지만,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지금 저승에 와 있었던 것이다.
 
  뜻밖이었던 것은 어둠침침하고 음침할 거라 생각한 저승의 모습이 환하고 밝았다는 것이다. 영호가 이러한 저승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쥬리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 쉬고 있었다.
 
  영호가 그러한 쥬리에게 물었다.
  “저승에도 시계가 있는 모양이네요?”
  “훗, 저승도 이승과 비슷한 체계를 가지고 있으니까 시간관념도 필요하죠. 자 서둘러요. 아저씨가 꼼지락거린 덕분에 많이 늦었다고요.”
 
  “늦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쥬리가 어깨를 으슥했다.
  “제가 휴식을 갖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죠.”
  영호는 실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쥬리를 따라 걸어갔다.
  주위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주위가 너무나도 환한 것에 의문을 가지고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태양은커녕 비슷한 것도 없었다. 도대체 이 빛은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바닥에는 잔디 같은 파릇한 것들이 돋아나 있었고, 드문드문 나무처럼 생긴 것들이 놓여있어 도저히 저승의 길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파릇파릇한 풀 같은 바닥에는 염라대왕이 있는 곳으로 뻗어있는 듯한 하얀 길이 앞으로 쭉 뻗어있었다.
 
  쥬리와 영호는 그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저승 이야기 좀 더해 줄래요?”
  “호기심이 많은 아저씨네.”
  “나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니까.”
  “이제 말 놔도 돼요. 저승에서는 제가 선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저씨보다는 어리니까요.”
 
  “그럴까, 그럼. 아가씨 이름이 쥬리라고 했던가?”
  “이승에서 사용하던 이름이죠. 이쥬리라고 해요.”
  “귀여운 이름이야. 생긴 것만큼이나.”
  “호호, 고마워요. 아저씬 여자 보는 눈이 있네요, 호호.”
  영호는 맥빠진 미소를 다시 지었다. 미스 정이 다시 생각나서였다. 미스 정이 정말 바람둥이였을까?
 
  “애인은 있었어요?”
  쥬리가 물었다. 영호는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긴 했지만, 그 여잔 나를 싫어했어.”
  “슬픈 짝사랑이었네요. 많이 괴로웠었겠어요. 그 여자가 아저씨의 첫사랑이었나요?”
 
  “아니. 내 첫사랑은...”
  쥬리가 영호를 돌아보았다. 영호는 슬퍼졌다.
  “오래 전에 죽었어.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죽었지. 몹쓸 병으로.”
 
  “‘러브스토리’처럼?”
  “그런 셈이지. 아, 그 사람도 어쩌면 이곳에 와 있겠구나!”
  영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하지만 쥬리의 표정은 영호의 기대를 바쳐주지 못했다.
 
  “죽은 지 오래되었다면 만날 수는 없을 거예요.”
  “왜?”
  “이미 천당이나 지옥에 가 있거나, 아니면 다른 육체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요.”
 
  “영혼이 다시 육체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잖아?”
  영호는 쥬리에 대한 불신감이 다시 생기는 걸 느꼈다.
  “물론 그렇죠. 제 말은 영혼 스스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거예요. 저 역시 그럴만한 능력도 없고요. 염라대왕도 그런 능력이 없어요. 염라의 윗분들만이 그런 능력이 있어요. 그렇다고 아무 영혼이나 육체에 이식시키지는 않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돼요. 제일 중요한 것은 영혼을 깨끗하게 만드는 거죠. 흔히 말하는 환생이라는 거예요.”
 
  “영혼을 깨끗하게 만든다고?”
  “네. 죄 값을 받는다고 하죠, 흔히들. 그런 거예요. 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에서, 착한 일을 한 사람들은 천당에서 일정한 기간을 지낸 다음에 새로운 육체로 이식이 되죠. 그게 새 생명의 탄생, 즉 아기의 탄생이죠.”
 
  “그럼 결국 첫사랑을 만날 수 없다는 건가.”
  영호는 맥이 빠졌다. 시련 당한 기분으로 술 퍼먹고 그날 죽어서 지금은 이렇게 저승길을 걷고 있는데도 기분은 여전히 우울했으니. 더군다나 첫사랑이 죽을 때 저승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저승에 와보니 그녀는 다시 이승으로 내려갔을지도 모른다니. 너무 비참한 시간들이었다.
 
  “자자, 기운 내요. 아저씨.”
  영호는 기운을 내고 싶어도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것에 왠지 감당 못할 슬픔이 밀려오는 듯했다.
 
  쥬리가 갑자기 소리를 쳤기 때문에 영호는 정신을 차렸다.
  “오, 맙소사. 오늘따라 행렬이 이렇게 길 줄이야. 정말 미치겠네.”
 
  영호는 쥬리가 무엇을 보고 놀라는지 알아차렸다.
  앞을 보니 하얀 길로 영혼들이 끝도 없이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쥬리는 자리에 덥석 주저앉았다.
 
  “이게 다 아저씨 때문이란 말이에요. 내가 가자고 했을 때 왔으면 이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돼는 건데. 우왕, 오늘은 편히 쉬기 다 틀렸구나.”
 
  ‘다혈질의 아가씨로군. 쩝.’
  사람들의 행렬은 몇 키로나 되는 듯했다.
  쥬리와 영호는 어쩔 수 없이 그 행렬의 뒷부분에 섰다.
  바로 앞자리에 있는 늙은 할머니 옆에도 영호처럼 저승사자가 붙어있었다. 쥬리처럼 젊은 미니스커트의 아가씨는 아니었지만 꽤나 젊은 축에 드는 청년 사자였다.
 
  영호는 흥미를 가지고 행렬을 살폈다.
  늙어서 죽은 듯한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었고, 병으로 죽은 듯이 보이는 창백한 아저씨도 있었다. 어린아이도 상당히 있었기에 조금 충격도 받았다.
 
  모두 죽은 사람이겠지 하는 생각을 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도 모두 나와 같은 시간대에 죽은 사람들인가 보구나.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는걸. 이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문뜩 쥬리의 말이 떠올랐다. 영혼은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없다고 한 말이.
 
  영호는 정신을 집중하여 앞에 있는 할머니에게 신경을 썼다. 그러자 할머니의 생각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가 죽었으니 할아범이 슬퍼하겠군. 먼저 가서 미안해요, 할아범.’
 
  좀더 앞에 있는 젊은 아가씨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이 많은 사람들은 뭐야? 난 사람 많은 곳이 싫은데. 내가 왜 이렇게 됐지? 그이는 내가 이런 곳에 있는지 알고 나 있을까? 빨리 돌아가고 싶어.’
 
  중년의 신사복을 입은 남자의 생각이 궁금했다.
  ‘제미럴.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그 망할 놈의 택시 운전사 때문에 죽어야 하다니. 만나기만 했단 다리몽둥일 부러뜨리고 말겠어. 그건 그렇고 내 자식놈들이 내 재산을 가지고 싸울 생각을 하니 답답하군. 멍청한 것들. 평생 뼈 빠지게 모아둔 재산들인데 그것들에게 고스란히 주어야 하다니 정말 억울해.’
 
  그 옆에 아직 학생인 듯한 여자에게 정신을 옮겼다.
  ‘흑흑, 엄마가 나를 기다릴텐데. 내가 죽은 줄 알면 엄마가 얼마나 슬퍼할까. 흑흑. 미안해요, 엄마. 엄마 말을 듣지 않아서 내가 죽었나 봐요. 다시 살수만 있다면 말 잘 들을텐데, 흑흑.’
 
  영호는 점점 생각을 느끼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미치겠군. 그 망할 놈의 여자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고작 바람 핀 거 가지고 날 죽인단 말이야. 그러기에 바람 못 피게 치장 좀 하라니까. 그렇게 펑퍼짐한 엉덩이에 출렁이는 가슴을 보고 누가 안고 싶겠어. 모두 망할 놈의 여편네 때문이야. 빌어먹을. 이 세상에 바람 한두 번 안 핀 남자들이 어디 있다고. 왜 나만 죽은 거냔 말이야.’
 
  ‘누굴까? 누구지? 내 남편? 내 동생? 아니면 나랑 상관이 없는 사람일까? 아냐, 상관없는 사람은 아닐 꺼야. 내가 아는 사람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잠겨있는 내방에 살그머니 들어왔겠어. 그럼 누구지? 남편?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 같아. 별거 중이기는 하지만 내 방 열쇠는 남편도 가지고 있었거든. 정말 남편 같아. 이를 어째. 정말 어떻게 하지. 남편이 나를 죽이다니.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 재산? 아니면 다른 여자 때문에? 정말 너무해. 그렇다고 부인인 나를 죽이다니...’
 
  ‘저는 여기에 있으면 안돼요. 난 아직 할 일이 있어요. 내 아이는 아직 어리단 말이에요. 아직 밥 먹는 법도 몰라요. 가족도 없고 친척도 없어요. 남편은 나를 버리고 도망가버렸고, 부모님도 안 계세요. 그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혼자 두나요? 내가 죽으면 그 아이도 죽어요. 흑흑흑.’
 
  ‘엄마는 어디 있을까? 엄마는 왜 안 보이지? 왜 낯선 사람들만 있는 거야? 너무 무서워. 아무도 나한테 말도 안 걸잖아. 엄마, 빨리 나를 찾으러 오세요.’
 
  영호는 더 이상 다른 영혼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들의 생각이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이다.
 
  ‘대부분이 슬픈 영혼들이구나.’
  쥬리가 영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다른 영혼들 생각을 엿보지 말아요. 저들은 아직 저승에 익숙지 않아서, 아저씨에게 생각을 읽히고 있다는 걸 눈치 못 채고 있을 뿐이라고요.”
 
  영호는 쥬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쥬리의 생각을 읽어보려 했다. 쥬리가 웃었다.
 
  “내 생각을 읽어보시려고요? 쉽게 안될걸요.”
  “왜 아가씨 생각은 안 읽혀지지?”
  “왜냐하면 전 저승에서 오래 생활을 했기 때문이죠. 이곳에서 오래 지내다보면 자신의 생각을 가둘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하게 되요. 아저씨나 저 영혼들은 저승에 갓 올라왔기 때문에 그 요령을 몰라 생각을 노출시키는 것뿐이라고요.”
 
  “그럼, 이승에서 내 생각을 읽은 것도...”
  “맞아요. 아저씨가 갓 죽은 영혼이었기 때문에, 제가 읽을 수 있었을 뿐이에요. 그리 특별한 능력은 아니죠.”
 
  영호는 저승에서 터득한 생각읽기 기술이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자 맥이 풀렸다.
 
  “행렬의 끝에는 뭐가 있어?”
  “염라 아저씨가 있는 궁(宮)이 있어요. 그 안에서 판결을 받고 저승이나 천당에 가게 되죠.”
 
  “아가씨도 전에는 사람이었다면서?”
  “맞아요.”
  “아가씬 어디로 갔었어? 천당? 지옥?”
  “아무 곳도 안 갔어요.”
  “무슨 말이야?”
  “곧장 저승사자로 발탁되었어요.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발탁? 그런 경우도 있나 보지?”
  “천당이나 지옥으로 분류하기에 에매한 경우만요. 예를 들면 뼈저리게 가난한 아들이 부모님의 약값을 모으기 위해서 강도질을 하다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던가 하는 경우에는 천당으로 보내기도 그렇고, 지옥으로 보내기도 그러니까 저승사자로 발탁하는 거예요. 저승사자로 일정한 기간 동안 일한 다음에 영혼을 정화하여 새 육체로 들어가게 되죠.”
 
  “그렇다면 아가씨도 그런 에매한 경우였겠네?”
  갑자기 쥬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영호는 자신이 말을 잘못했구나 생각했다.
 
  ‘이 아가씨도 역시 슬픈 영혼인가 보군.’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괜한 것을 물어 본 것 같네.”
  “듣고 싶으시다면 해드릴게요. 어차피 지금은 지나간 일이니까. 이 세상에서 둘도 없이 친한 친구가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할 때까지도 우린 붙어서 지냈죠. 몸의 어디어디에 점이 있는지 다 알 정도로 우린 친했죠. 그리고 평생 같이 지내자고 맹세까지 했어요. 어느 날인가 그 애가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하데요. 난 질투심도 생겼지만 축하해줬어요. 그리고 그 남자 친구를 소개 시켜줬어요. 잘 생겼고 매너도 좋아서 그 애하고는 잘 어울릴 것 같았었죠. 우리 셋은 여러 곳을 놀러 다녔죠. 그 애와 그 남자가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했죠. 나는 질투심을 버리고 진심으로 축하해줬는데...”
 
  영호는 묵묵히 쥬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쥬리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죽기 두 달 전에 이 남자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만나자고 하더군요. 나는 서슴없이 약속 장소로 나갔어요. 그런데 있을 거라 생각했던 친구는 없었고, 그 남자뿐이었어요. 단 둘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어색했는데 남자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더군요. 친구에게는 미안했지만 그 시간을 즐겼어요. 그렇게 그 남자와 단둘이 만나는 시간이 많아지자 불안해 졌어요. 친구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고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죠. 다섯 번째 만나던 날, 결혼 준비는 잘되어가냐고 물었더니 남자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더군요. 한참을 말없이 담배만 피우다가 대뜸 말하는 거예요. 나를 좋아한다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이에요. 난 혼동스러웠죠.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몰랐어요. 혼동스럽더군요. 사실 나도 그 남자가 좋아졌거든요. 하지만 친구 역시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갈등이 심했어요. 그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동안 남자는 나에게 키스를 요구했어요. 난 얼떨결에 받아들이고 말았죠. 한달 동안 죄책감과 즐거움 속에서 보냈어요. 그리고 얼마 후에 사건이 일어났죠.”
 
  쥬리가 한숨이 내 쉬었다.
  “우연찮게 난 그 남자가 내 친구가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목격했어요. 미행을 했죠. 한적한 곳에서 그 남자는 내가 전혀 모르는 다른 여자와 키스를 하더군요. 배신감과 분노에 눈이 멀고 말았죠. 친구에 대한 죄책감. 남자에 대한 배신감. 나에 대한 분노. 그러한 것이 그만 살인으로 표출됐어요. 그 남자가 일하는 회사의 옥상에서 만났죠. 그리고 그대로 밀어버렸어요. 그리고 나 역시...”
 
  쥬리의 눈에 물방울이 맺혔다. 영호 자신도 슬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끝이에요. 마지막으로 친구를 보지 못하고 죽은 게 슬퍼요. 아직도 진실을 모르고 살텐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던 남자와 친했던 친구를 잃은 그 애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파요.”
 
  영호는 뭐라 위로의 말을 생각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억지로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슬픔에는 익숙하거든요.”
  ‘이 세상에는 나 보다 더 슬픈 사람도 있구나.’
  영호는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열렬히 사랑했던 첫사랑과의 사별 뒤로 여자를 사랑하지 못하게 된 자신과 미스 정에게 당했던 쓰라린 추억이 물밀듯이 파고들었다.
 
  쥬리가 말했다.
  “이 세상에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저승사자라서 이승에 있는 친구를 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나는 주로 밤에 영혼을 데리러 다니는데 옮길 영혼이 너무 많아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천상 만난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말을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가슴만 아프죠.”
 
  영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쥬리의 아픈 과거만 들추어 낼 것 같기에.
 
  그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하루에 몇 명이나 저승으로 데려와? 지금 보니까 염라의 궁까지 가는데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데 한 명씩 데려가면 몇 명 안될 거 같네.”
 
  “훗, 오늘은 아저씨가 마지막이라 궁까지 바래다주는 거라고요. 어차피 저도 궁에 들어가야 하니까요. 보통 때는 행렬에다 세워놓고, 행렬 감사자의 서류에 사인만 하고 끝내요. 이렇게 행렬이 길줄 알았으면 그냥 사인만 하고 아저씨랑 바이바이 하는 건데.”
 
  “섭섭하게 그게 무슨 소리.”
  영호는 진심이었다. 낯선­그것도 죽어서 온 저승에 이렇게 말벗이라도 있는 게 그에겐 다행이었던 것이다.
 
  행렬은 생각보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멀리 행렬의 끄트머리에 이상한 다각형의 모양을 한 궁이 보였다. 영호는 묘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만일... 내가 지옥에 간다면 어떻게 되지?”
  “죽지 못하는 고통이 기다리겠죠. 아까 내가 보여주었던 쇼크보다 더한 고통이겠죠.”
 
  “아가씨도 모르나 보네.”
  “가보지 않았으니 모르죠. 천당도 가보지 못했으니 어떤 행복이 있는지도 몰라요.”
 
  “저 궁까지 안내하면 아가씨는 다른 영혼을 데리러 가겠군?”
  영호는 왠지 이 아가씨와 헤어진다는 것이 아쉬워졌다.
  “오늘은 아저씨가 마지막이라고 했잖아요? 좀 쉰 다음에 밤이 되면 다시 영혼을 나르는 일을 하게 되겠죠.”
 
  “저승사자 생활은 얼마나 해?”
  “글쎄요. 아직 그건 몰라요. 염라 아저씨 맘이니까. 아마도 꽤 있어야 될 거예요. 이 일 한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앞으로 일년? 이년? 십년? 백년? 아니면 천년?”
 
  “그 염라란 사람 빨리 보고 싶어지는군.”
  “보면 재미있을 걸요, 훗”
  쥬리는 금새 예의 그 명랑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감정이 금방 바뀌는 아가씨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영호의 뒤에는 죽은 영혼들이 저승사자의 손에 이끌려 속속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궁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이야기의 화제가 떨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궁의 입구에는 근엄한 표정의 등치 빵빵한 경비병들이 서 있었다. 영호는 서서히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염라대왕의 모습을 조금만 있으면 보게 되겠군. 괴물 같은 모습일까? 아니면 나처럼 사람 같은 모습일까? 무엇보다도 내가 지옥에 갈지 천당에 갈지 모르겠군. 저 아가씨처럼 묘하게 죽은 것도 아니니까 저승사자가 될 리는 없고. 휴우.’
 
  왠지 모를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쩌다가 이런 일을 겪게 된 것일까. 하긴 나 혼자만 겪는 건 아니겠지. 죽은 사람 모두 이런 일을 겪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난 아직 젊잖아. 아직 결혼도 못했고, 여자 경험도 없는데 말이지. 여자 경험이라고 해봐야 첫사랑과 키스한 것밖엔 없는데 너무 억울하다. 다시 살아날 수는 없는 걸까.’
 
  영호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쥬리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아무 생각 없는 인형처럼, 궁으로 들어가고 있는 영혼들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두 명의 경비원을 지나 드디어 궁 안으로 들어섰다.
  기대했던 만큼 궁 안의 모습은 화려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나왔던 염라대왕이 기거하는 곳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벽이면 천장에는 지상에서 유명하다 싶은 그림의 액자와 석상들이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이 누드라는 점에서 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염라대왕은 색골인가 보군.’
  영호가 들어간 곳은 대기실 같았다. 병원의 대기실처럼 의자가 있었고 많은 사람­아니 영혼들이 이름이 불려지기를 기다리며 앉거나 서있었다.
 
  쥬리는 영호를 기다리게 하고는 접수처 같은 곳으로 가버렸다. 그곳에서 접수를 받는 이와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그에게로 돌아와 말했다.
 
  “휴우, 이제 접수가 됐어요. 조금 있으면 아저씨 이름이 호명될 거예요.”
 
  “그럼 염라 대왕 앞으로 가서 판결을 받는 건가?”
  “아뇨. 당장은 아니에요. 저승에 온 영혼들에 대한 이승행적 조사를 해야 되거든요. 보통 이삼일 걸리니까 그 기간동안은 안내원이 배정해 주는 방에 들어가서 쉬게 되요. 영혼도 피곤함을 느끼니까 푹 쉬는 게 좋아요.”
 
  “그럼, 아가씨는?”
  “오늘 임무를 끝냈으니 이제 편안하게 숙소로 가서 쉬어야죠. 정말 피곤했던 하루였으니까. 이젠 아저씨하고도 이별이네요. 앞으로 볼일이 없을 거예요. 천당에 가든 지옥에 가든 잘 살아요, 호호. 어울리는 인사말 같지는 않지만.”
 
  영호도 적당한 이별의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쥬리는 벌써 손을 흔들며 다른 문으로 사라져 버린 뒤였다. 이제는 이 싸늘한 대기실에 그 혼자만 남은 것이다.
 
  쥬리라는 아가씨와 이곳으로 오는 짧은 시간동안이라도 재미있었는데, 쥬리마저 없어지자 다시 외로움이 찾아왔다.
 
  ‘외로움을 느끼는 영혼이라니 한심하군.’
  영호는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갖가지 영혼들로 가득 찬 대기실은 만원이었다. 다행히도 영호의 바로 앞에 있던 영혼이 호명을 받고 안내실로 가는 바람에 자리가 생겼다. 그는 자리를 빼앗길 새라 얼른 가서 앉았다.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특이할 만 것이 없었다.
  사람 형상을 한 영혼들 역시 서로 모르는 사이인지라 옆 사람과 이야기도 못한 채 죽었다는 충격을 느끼려 노력하고 있는 듯했고, 간혹 교통사고로 같이 죽은 사람들은 못 다한 이승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죽었다는 걸 실감했는지 펑펑 우는 아가씨도 있었다.
 
  모두다 딴 나라 사람들처럼 여겨졌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죽었단 말인가. 휴우. 쥬리라는 아가씬 지금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겠군. 친구의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또 죽이기까지 한 귀여운 저승사자라. 참으로 재미있군.’
 
  영호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는 텔레비전도 없고, 신문도 없었고, 잡지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창백한 안내원들과 갖가지 이유로 죽은 영혼들뿐이었다.
 
  상념에 빠져있는 통에 그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미쳐 듣지 못했다.
 
  “문영오 씨. 안내실로 나오세요.”
  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내실로 갔다.
  깔끔한 옷차림의 중년남자가 명부에 있는 사진과 영호를 노려보듯 번갈아 쳐다봤다.
 
  “문영오 씬가요? 사진보다 조금 찐 것 같군요.”
  “네. 그런데 영오가 아니고 영호인데요.”
  “잘못 기재한 모양이네요. 알았어요, 저 안내원을 따라가요. 방을 안내해 줄 겁니다.”
 
  영호는 뚱뚱한 하얀 옷의 안내원을 따라 대기실 밖으로 나가는 문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복도가 있었고, 벽은 온통 연한 푸른빛 투성이였다. 병원의 깔끔하면서도 차가운 복도 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내원은 그를 301이라 적혀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차례가 되면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방에서만 푹 쉬도록 하세요.”
 
  영호는 안내원이 말한 내용 중 ‘방에서만’이란 단어에 악센트가 들어있는 것을 눈치챘다. 이 방에서 나가면 안 된다는 뜻이리라.
 
  영호는 심호흡을 한번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