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10. 영혼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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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10. 영혼 카페

행복 카페 이야기

Happy Caf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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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카페

이정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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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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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남자가 행복 카페로 들어선다.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온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카페 안 위치를 잘 알고 있는 듯 망설임 없이 구석의 테이블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 테이블에서 그를 기다리며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람은 없다.
 
  조금은 딱딱한 의자에 앉자마자 무표정한 얼굴의 여종업원이 물컵을 들고 다가왔다. 그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은 채 마티니를 시켰다.
 
  마티니가 도착할 때까지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자리만을 지켰다. 시계를 들여다보는 행동도 하지 않았고, 초조해 하며 담배를 물지도 않았다.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마티니가 그의 앞에 놓이고 나서도 그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듯한 평범한 그의 얼굴을 여종업원이 힐끔 쳐다보고는 관심 없다는 듯 돌아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팔을 뻗어 마티니를 조금씩 마셨다.
  ‘이 카페에서 마시는 마티니도 벌써 8번째로군.’
  한달 동안 8번이나 이 카페를 찾은 것이다.
  ‘앞으로 이 카페에서 마티니를 마실 기회는...... 없겠지.’
  그는 텅빈 잔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는 잔 주위를 깨끗하게 닦았다. 손수건은 다시 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카페 안은 조용했다. 무표정한 여종업원은 빈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카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카페 한쪽에 마련된 컴퓨터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신경과민인가?’
  하지만 그 느낌은 아직도 살아있다. 그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면은 방금 전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은 여전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마음이 불안해 졌다. 긴장이 됨과 동시에 초조해 졌다.
  그는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그러자 책을 읽고 있던 여종업원도 덩달아 일어섰다. 그는 계산대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고, 여종업원 역시 계산대로 향했다.
 
  여종업원이 계산표를 보며 액수를 말하자 그는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어 내밀었다. 여종업원이 잔돈을 준비하는 짤막한 시간에 그는 다시 한번 오한을 느꼈다. 카페 안의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은 그를 알 수 없는 공포로 몰아갔다.
 
  여종업원이 잔돈을 내밀자 그는 얼른 받아 들고 카페를 벗어나기 위해 문을 열었다. 몸을 밖으로 내밀기 전에 다시 한 번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책을 읽기 위해 다시 테이블로 향하는 여종업원과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카페 주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삼자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삼자를 찾기 위해 눈동자를 바삐 움직였다. 카페 안의 테이블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문뜩 어느 한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 시켰다. 그 테이블은 밀레의 그림이 걸려 있는 - 그녀가 늘쌍 앉던 자리였다. 그를 쳐다보는 시선은 그 곳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 그 테이블에는 아무도 없다.
 
  그는 한참동안 멍한 기분으로 그 테이블을 응시했다.
  그는 시선을 떨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경과민이 틀림없어.’
  그는 카페 문을 나선 뒤, 문을 닫았다. 문을 닫음과 동시에 그 시선은 뚝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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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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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제복을 입은 여러 남자들이었다. 푸르스름한 그 제복이 경찰들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자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왜 경찰들이 내 방에 있는 거지?’
  수정은 자신의 방을 요란스럽게 돌아다니는 경찰들을 구석에 서서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방금 자신의 앞을 지나간 젊은 경찰에게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잠이 든 사이에 강도라도 들어온 건가?’
  과연 그녀의 방안은 엉망이었다. 서랍은 모두 열려져 있었고, 방안에는 옷가지들과 책들이 난잡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 사이를 경찰들이 오고가니 더욱 혼란스러워 보였다.
 
  문뜩 자신이 아직 잠옷을 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실내복이라도 입어야 할 텐데.’
  그녀는 두리번거리며 옷장을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방안을 가득 메운 경찰들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음탕한 시선을 주지는 않았다. 아마 방에서 일어난 어떤 일 때문에 몹시 바쁜 모양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옷장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하지만 옷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방을 가로질러야 했고, 그 사이에는 몇 명이나 되는 경찰들이 오고가고 있었다. 차마 그 틈을 비집고 나아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구석진 그 곳에 계속 서 있어야만 했다.
  어수선함과 혼란함 속에서 그녀는 의지할 곳 없이 계속 서있었다. 그 시간은 굉장히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화가 났다.
 
  ‘도대체 내 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왜 이렇게 혼자 서 있어야만 하지? 여긴 내 방이란 말이야.’
 
  그녀를 엄습한 무료함은 화를 만들어 냈고, 그것은 그녀의 소극적인 태도를 이기고 말았다. 그녀는 바로 앞을 지나가는 경찰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하지만, 경찰은 못 들은 것인지, 아니면 듣고도 모른 체 하는 것인지 대꾸 없이 자신이 맡은 일만 묵묵히 해 나갔다. 그로 인해 수정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내 방에서 무슨 짓들을 하는 거예요!”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큰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포기하고 말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들것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피곤한 표정을 지은 채 아무 생각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배 언저리가 아파 왔다.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배를 살짝 만져보았지만 상처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통증이 느껴지는데 상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복통이나 채한 것은 아니다. 무언가가 살점을 찢고 들어오는 듯한 고통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고통은 들것을 들었던 두 남자가 그녀의 침대에서 뭔가를 들어 들것으로 옮길 때 더욱 심하게 그녀를 괴롭혔다.
 
  들것에 뭔가를 실은 두 남자는 다시 들것을 들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녀는 새하얀 도포로 덮여져 있는 들것의 그것을 보려고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새하얀 도포의 형태로 보아서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수정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구석에서 벗어나 들것에게로 다가갔다. 그 때 평상복을 입은 한 남자가 방으로 들어오더니 들것을 힘겨이 들고 있는 남자들에게 뭔가를 내밀어 보였다. 수정은 그것이 경찰 신분증임을 알아 차렸다. 평상복의 남자는 새하얀 도포를 살짝 들고는 안의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그 틈을 이용해 수정도 도포 안의 내용물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들추어진 도포 안에는 새하얗게 식어버린 한 여자의 무표정한 얼굴이 담겨져 있었다. 수정은 멍하니 그 얼굴을 주시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칼에 이목구비가 확실한 얼굴 생김생김. 확실히 익숙한 얼굴이었다.
 
  죽어있는 여자의 정체가 떠올랐을 때 그녀의 머리는 멍해졌다. 두 남자에 의해 들것에 실려 가는 여자의 시체는 바로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충격과 함께 혼동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입을 열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꿈일 거야. 꿈이 틀림없어. 빨리 잠에서 깨어야지. 이런 악몽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이건 꿈이야.“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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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은 눈을 떴고, 자신이 잠깐동안의 악몽에 시달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악몽 때문이라 생각하며, 누워있는 채로 방안을 둘러보고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방안은 옷가지들과 책들로 어지럽혀져 있고, 바닥에는 무수히 많은 발자국들이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다시금 둘러보았다. 악몽 속에 등장했던 경찰들만 없을 뿐 그때의 어수선함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를 바라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랬다. 선명한 핏자국이 침대에 나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도대체·······.’
  또다시 배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상처 없이 스며드는 고통에 잠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고통이 서서히 사라져 갈 쯤에 자신이 왜 이런 혼란스러움을 겪어야 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잠들었을 때 뭔가가 입을 막았어. 깜짝 놀라서 잠이 깨었고, 배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파고들었지. 발버둥을 쳤지만 너무나 억세 팔이 나를 잡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고, 잠시 후에 정신을 잃은 것까진 기억이 나. 그렇다면······.’
 
  그 다음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떠오른 생각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주저앉고 말았다. 오열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수정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어야 했다.
 
  ‘아냐. 이럴 수는 없어. 내가······ 믿을 수 없어. 내가····· 죽었다니······.’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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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이 되었다는 사실을 점점 실감하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것은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다. 어딜 보아도 영혼 같은 구석이 없었다. 몸이 투명한 것도 아니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연기처럼 흐느적거리는 다리가 있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녀의 다리는 사람의 다리처럼 튼튼하게 땅을 내딛고 있었다.
 
  ‘정말 내가 영혼이 된 건가?’
  자신이 영혼이라는 사실은 점점 믿게 되었지만 그럴수록 의아한 것은 그녀가 살아생전 생각해 오던 사후세계와의 차이점이었다.
 
  ‘저승사자는 어디 간 거지? 원래 사람이 죽으면 영혼을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오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내가 영혼이 아닌지도 몰라.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걷고 있잖아?’
 
  그녀는 거리를 걷고 있었지만 자신이 영혼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일반 사람들처럼 걸어다니고 있었다.
 
  어느 쇼윈도우를 지나칠 때 그녀는 익숙한 모습에 발걸음을 멈추고 안에 장식된 옷을 감상했다. 쇼윈도우에는 화려한 옷을 과분하게 입고 있는 마네킹과 더불어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투영되고 있었다. 수정은 그 쇼윈도우에 반사되는 거리의 사람들 중에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외면하고 말았다. 그녀는 슬퍼졌다.
 
  ‘역시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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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안에 울리고 있는 ‘Unchained Melody’의 선율이 애절하게 귓전에 맴돌았다. 오래 전에 불리어진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그 간단하면서도 애절한 선율은 여전히 고왔다.
 
  늘쌍 앉던 그 자리는 오늘도 비어 있었다. 그 테이블 뿐 만이 아니라 다른 테이블 역시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카페는 편안한 분위기를 주는 것에 비해 손님이 적었다. 그 때문에 편안한 기분이 드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 살짝 앉았다. 바로 옆벽에는 밀레의 ‘만종’ 복사본이 걸려 있었다. 수정은 그 그림 때문에 이 자리를 자신의 자리로 정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밀레의 예술을 좋아한다거나 서정적 미술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그림에서 풍기는 잔잔한 평화로움이 이 카페와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종업원이 그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테이블에 놓여진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카페의 커피는 맛있었다. 그런 이유로 평상시에는 커피 외의 다른 메뉴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다른 것을 마셔보고 싶어졌다. 무엇을 시킬까 골똘히 생각하는 사이에 여종업원이 도착했다. 하는 수 없이 여종업원을 기다리게 하지 않기 위해 커피를 얼른 시켜 버렸다.
 
  여종업원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덥석 앉아 버렸다. 뜻밖의 행동에 놀란 것은 수정이었다. 그녀는 멀뚱멀뚱 여종업원의 무표정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맞은 편에 앉은 여종업원은 테이블 위에 소설책을 꺼내어 놓고 조용히 읽어가고 있었다. 순간, 수정은 자신이 육체를 잃어버린 영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서글퍼졌다.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작은 한숨소리가 귀여운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그녀는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독서하는 여종업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마 저 여종업원은 영혼이 된 한 여자가 자신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을 것이다.
 
  문뜩 여종업원의 무표정한 얼굴과 어떤 남자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 남자도 늘쌍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은 있다. 그녀처럼 그도 이 카페에 자주 찾아온다. 어쩌면 다시 올지 모른다. 그러면 얼굴을 볼 수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약간의 희망이 생긴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깜짝 놀란 그녀가 서둘러 고개를 들어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그 남자는 아니었다. 30대의 직장인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또 다른 남자와 함께 빈 테이블에 앉았다. 수정의 앞자리에서 책을 읽던 여종업원이 일어나 주문을 받기 위해 그쪽으로 향했다. 수정은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며 여느 때와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외로울 때마다 이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이고, 잠깐잠깐 카페 안의 풍경을 감상하던 지난날처럼 변한 것은 어느 것도 없었다. 단지 변한 것이라면 아무도 그녀에게 주문을 받지 않는다는 것 뿐.
 
  그녀는 슬퍼졌다. 슬픔은 그녀에게 있어 익숙한 감정이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달 전에는 유일한 말동무였던 친구도 하늘나라로 갔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 자신조차 죽은 것이다. 이 세상에는 슬픈 일로만 가득 찬 듯 싶다.
 
  슬픔으로 가득 찬 한숨 소리가 계속 새어나왔지만,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죽기 전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그가 나타나기만을 은근히 기대했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살고 있는지만 안다면 그리로 달려갔을 텐데, 불행하게도 그녀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름이 무엇이며, 직장이 어디이고, 어느 곳에 사는지 전혀 모른다. 단지 아는 것이라곤 무표정한 얼굴, 갈색 양복, 마티니, 신문, 손수건과 때때로 이 카페에 모습을 들어낸다는 것뿐이다. 말을 걸어 본 적도 없다. 몇 번의 눈맞춤이 고작이었다. 그와 그녀는 철저한 남남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고 싶었다. 한 번만이라도 다시 얼굴을 보고 싶었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른다. 그저, 단지 아무런 이유 없고 보고 싶을 뿐이었다.
 
  시간은 흘러 저녁으로 해가 기울자 한산했던 카페에도 손님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고, 카페 안은 좀전과는 달리 어수선해졌다. 분위기가 그렇게 변하자 수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그가 나타나지 않는가 보다. 그녀는 조용하게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
 
  문뜩 한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젊은 남자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어젯밤에 여기서 가까운 원룸에 강도가 들었데······ 죽은 사람은 여자인데, 이름이 뭐라더라? 은정인가? 수정인가? 아무튼 배에 칼이 찔렸다고 하더라······ 처녀가 사라지는 건 정말 슬픈 일이야. 우리 같은 총각들에게는 말이지······”
 
  대번에 그 화제의 주인공이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이야기를 슬프게 들었다. 이야기를 들고 있노라니 배언저리가 욱씬욱씬 아파 오기 시작했다. 아마 칼에 찔린 부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강도가 들어와 나를 찔렀다고? 훗, 정말 재수 없는 여자로군, 나라는 여자는.’
 
  그녀는 씁쓸한 마음으로 카페를 나섰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도시는 아름다웠다. 곳곳에 수놓아져 있는 불빛들이 밤하늘에 걸린 별빛과 어우러져 멋진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밤거리를 걸으며 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내일은 그를 볼 수 있을까?’
  철저히 혼자가 되어 버린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제 그 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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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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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새도록 울은 탓에 눈두덩이가 퉁퉁 불어 있었다. 잠깐 붙인 눈을 뜨고 거울을 보았을 때는 전혀 낯선 사람의 얼굴로 보일 정도였다. 수정은 거울에 비춘 자신의 얼굴을 아무 생각 없이 빤히 쳐다보았다. 긴 생머리에 갸름한 얼굴은 예쁘다기보다는 귀엽다는 말이 어울렸다. 퉁퉁 부은 눈과 피곤에 쌓인 거친 피부이기는 했지만 순진함을 가리지는 못했다.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녀에게 충격이었다. 며칠 전 만해도 깔깔 웃으며 주말에 영화 볼 계획을 세웠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죽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같은 회사 동료 직원들의 위로 속에 어떻게 하루가 지났는지 모른다. 휴가 신청을 내고 나서 며칠 마음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늦은 밤 전화 걸 친구가 없다는 사실은 곧장 슬픔으로 연결되었다.
 
  밀려오는 슬픔을 잊기 위해 영화관을 찾거나 책에 몰입을 하려했지만, 자꾸만 죽은 친구의 얼굴이 떠올라 슬픔에 슬픔만 더할 뿐이었다.
 
  선화와는 고등학교 막바지 때부터 같이 어울리게 되었다. 그녀와는 달리 선화는 늘쌍 쾌활한 성격에 웃음이 어울리는 발랄한 아가씨였다. 선화는 자신이 본 영화나 소설 이야기를 과장된 몸짓을 덧붙여 이야기 해 주었고, 수정은 그런 그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같은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 후 직장도 같은 곳으로 잡았다. 그런 만큼 수정이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였다. 그런 그녀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수정은 행복 카페를 찾았다. 이곳을 알게 된 것도 활동적인 선화 덕분이었다. 선화는 이 카페의 분위기가 너무 잔잔해서 싫다고 했지만, 수정은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그래서 둘이 같이 커피를 마실라치면 어김없이 이 곳으로 왔다.
 
  오늘은 혼자 이 곳을 찾아 왔다. 밀레의 그림이 걸린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시켰다. 맞은편 자리에 선화가 앉아 있는 냥 맞은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당장이라도,
 
  “야! 수정아!”
  라고 소리치며 선화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만일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선화는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정은 밝게 웃어 보였다. 나쁜 일이 있어도 언제나 즐겁게 받아들이는 선화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행복 카페를 찾게된 것은 그날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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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흐르자 친구에 대한 슬픔도 조금은 사그라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혼자가 되면 그 친구가 떠오른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행복 카페를 찾았다. 이 곳에 오면 그 친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그날도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몇 분 일찍 회사를 나와 이 곳을 찾았다. 마음이 괴로울 때는 바쁘게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언젠가 친구가 말했었다. 하지만 요즘 그녀의 회사는 어수선할 뿐 바쁜 것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회사의 우두머리인 사장이 병으로 눕게되자 회사 안은 시장터처럼 어수선하게 변했다. 떠들기 좋아하는 어느 남자 사원은 회사가 곧 망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퍼뜨려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기획실 이 대리는 사장의 유산 상속을 둘러싼 친족들간의 암투가 있을 것이라는 말로 역시 상사의 꾸지람을 들었다. 말 많은 여사원들은 사장의 외동딸이 회사를 물려받게 될 것이며 그녀의 남편이 바람을 피우다 들통이 났다는 등의 수다로 휴식 시간을 허비했다. 회사의 분위기가 그 모양이니 일에 손이 잡힐 리가 없다. 그저 책상머리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친구와의 추억을 하나씩 끄집어내며 시간을 보냈다. 친구가 웃으며 내뱉던 말들 하나하나가 그녀를 즐겁게 해주었다.
 
  “수정아, 너 결혼 안 할 거니?”
  선화가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난 이대로가 좋아.”
  “그런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으니까 아직까지 솔로인 거야. 사랑은 쟁취라는 말 몰라?”
 
  “그러는 너도 아직 솔로잖아.”
  “나야 쫓아다니는 남자가 하도 많아서, 고르다 고르다 지쳐 포기한 거지.”
 
  “피이.”
  선화와의 대화는 늘쌍 그런 식이었다. 대부분의 화제는 결혼이야기였지만 사실 수정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대학 시절에는 귀여운 얼굴과 조용한 성격 때문에 쫓아다니던 남학생이 한둘 있기는 했지만, 계속 무관심하게 대하자 다들 포기하고 물어났었다.
 
  “기획실 이 대리가 너한테 관심이 있는 거 같더라? 오전에도 나한테 너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봤었어.”
 
  선화가 넌지시 말을 끄집어냈다.
  “안경 쓰고 통통한 남자 말하는 거지? 난 별로 관심 없어.”
  “정말?”
  “응.”
  “그럼, 내가 가진다.”
  “맘대로.”
  “정말 싱겁다, 싱거워.”
  수정의 이성 문제만큼은 선화도 포기한 듯 싶다.
  “넌 애인 있어?”
  선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정을 바라보았다. 늘쌍 질문만 하던 선화는 오히려 질문을 받게 되자 조금은 당황한 듯 싶었다. 아니면 질문 내용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글쎄 애인이라. 있을 거 같아?”
  “없을 거 같아.”
  “딩동댕, 정답입니다. 짝짝짝.”
  수정과 선화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런 즐거웠던 대화들이 더욱더 씁쓸하게 느껴지는 건 역시 친구의 존재가 없다는 것 때문이리라.
 
  “어머! 죄송해요!”
  여자의 화들짝 놀란 소리에 수정의 공상이 멈추었다. 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여종업원은 고개를 수그리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고,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 손님은 자신의 허벅지에 쏟아진 커피를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종업원의 실수에 놀란 카페 주인이 다가와 역시 죄송하다며 허리를 굽혔다. 실수의 당사자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님에게 내밀었고, 남자는 손수건을 받아들고 말없이 쏟아진 커피를 씻었다. 그리고는 세탁비를 주겠다는 카페 주인의 제한을 거절하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는 여종업원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며 괜찮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나서 카페는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왔다.
 
  그 남자는 카페 주인과 여종업원을 돌려보내고 나서 살짝 수정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수정은 얼른 고개를 외면했다. 처음 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애꿎은 커피 잔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곁눈질로 옆을 돌아보니 그 남자는 커피로 인해 얼룩진 신문을 조심스럽게 읽고 있었다. 이유도 없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 문뜩 남자의 얼굴이 처음 보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어디서 봤는지 기억에 없다. 어쩌면 이 카페의 단골이라 언뜻 스쳐 본 얼굴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단정 지었다.
 
  그날은 그 남자가 이 카페에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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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인들의 주말이 다가왔다. 낙엽이 떨어진 거리를 다정하게 걷는 연인들을 뒤로하고, 수정은 어김없이 행복 카페를 찾았다. 이제는 버릇처럼 이곳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언제나 앉던 밀레의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시켰다. 카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늘쌍 앉던 테이블에 앉는 것도 언제나처럼 똑같았다. 그녀는 눈치 채지 않도록 곁눈질로 남자를 훑어본다. 이상했다. 언젠가 여종업원이 실수로 남자의 옷에 커피를 쏟은 적이 있었다. 그 날부터 그 남자는 행복 카페를 찾을 때마다 항상 눈에 띄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아 마티니만을 시켰으며, 손에는 항상 신문이 들려져 있었다. 평범한 갈색 양복을 입은 모습이 쉽게 잊혀지는 타입이었다. 수정은 그 남자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어떤 남자일까? 나처럼 친한 친구를 잃은 것일까? 아니면, 그냥 우연히 들린 것일까?’
 
  우연치고는 너무나 우연스러웠다. 벌써 세 번째다. 이 행복 카페에서 저 남자를 보는 것이 말이다. 저 남자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언뜻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설마 저 남자가 나 때문에 여기에 오는 것은······.‘
  수정은 곧바로 그 의견을 거부했다. 저 남자는 그 첫날 이후로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수시로 눈길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 남자는 마티니와 함께 신문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도대체 어떤 남자일까?’
  특이할 만한 점은 없었다.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옷차림. 어느 것 하나 특이할 만한 것이 없다. 특이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특이할 정도랄까. 아니, 딱 하나 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항상 손수건으로 자신이 마신 잔을 닦는다. 결벽증 증세가 있는 남자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그 것 외에 남자에게서 풍기는 매력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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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이 지나 다시 카페를 찾았을 때에도 어김없이 그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 날 만큼은 그 남자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녀 자신에게 들이닥친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병으로 누워있던 사장이 오늘내일 한다는 소문이 회사 안을 더욱 어수선한 분위기로 만들었고, 친구의 죽음이 사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 역시 회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심지어는 사장 외동딸의 남편과 선화가 은밀한 관계였을 지도 모른다는 헛소문 마저 돌았다. 그 말은 추리소설 광인 그녀의 회사 동료 입에서 나왔다. 화가 치민 수정은 당장 기획실 이 대리를 찾아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근거 없는 소문 퍼뜨리지 말아요! 그 친구한테는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있었다고요! 그 따위 헛소문으로 내 친구를 욕되게 하지 말란 말이에요!”
 
  생전 처음으로 화를 낸 것 같았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서 있는 이 대리를 뒤로한 채 무작정 회사를 튀쳐 나온 것이 바로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선화에게 애인이 있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 당황해 하며 전화를 끊던 선화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 무슨 전화야?”
  “응. 아무 것도 아냐.”
  수정은 수상한 눈빛으로 선화를 쳐다보았다.
  “너...... 남자 생겼지? 그렇지?”
  갑자기 선화가 가슴에 총을 맞은 시늉을 해 보였다.
  “읔! 심장을 꽤 뚫는 예리한 질문!”
  “누구야? 도대체 누군데 나한테까지 비밀이야?”
  선화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켰다.
  “쉬이. 아직까지는 비밀. 나중에 소개시켜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어. 놀랄 준비나 단단히 하고 있으라고. 나중에 놀라지 말고 말이야. 호호.”
 
  그 때 선화의 얼굴은 사랑에 빠진 행복한 여자의 모습 그대로였었다. 그런 선화의 얼굴을 사람들은 그 따위 몹쓸 소문들로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그러니 몸마저도 안 좋아진 것 같다. 그녀는 커피를 홀짝이며 회사를 그만 둘 궁리를 했다.
 
  친구의 죽음이 사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쾌하게 불어났다. 선화가 사장의 정부였다느니, 사장의 숨겨놓은 딸일지도 모른다느니 하는 식으로 소문은 퍼져갔고, 그 이야기를 웅얼거리는 사원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죽은 친구와 유난히 친했던 탓에 그 소문에는 그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화 씨는 사장의 숨겨 놓은 딸이고, 수정 씨는 사장의 정부일지도 몰라. 아마도 둘은 사장이 죽을 때가 되자 서로 재산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선화 씨를 죽인 게 수정 씨일지도 몰라.”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 어디서 퍼졌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람들은 왜 한 사람의 죽음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걸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그럴 때마다 수정은 더욱더 슬퍼진다. 그냥 소리내어 울고만 싶다.
 
  ‘역시 회사를 그만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수정은 힐끔 그 남자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마티니와 신문을 함께 하고 있었다.
 
  ‘지금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항상 같은 자리에서 마티니를 마시는 걸까? 이름은 무엇일까? 어디에 살까? 결혼은 했을까?’
 
  고작 4번 보았을 뿐인데도 관심이 생겼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모습이기 때문일까? 그건 그녀 자신도 몰랐다. 그저 4번씩이나 같은 카페에 같은 시간에 같이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관심이 생긴 것 같다.
 
  남자는 왼손으로 신문을 잡고, 오른손으로 마티니 잔을 잡고 있었다. 눈은 계속 신문을 주시했고, 오른손은 이따금씩 입으로 마티니를 옮겨 놓았다. 그것이 그 남자의 모습 전부였다. 어쩌면 이 카페의 단골이거나 카페 주인과 친분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해본다.
 
  그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어났다.
  수정은 남은 커피를 마저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대에서 커피값을 지불하며 살짝 그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수정을 향해 고개를 향한 채였다. 두 눈이 마주쳤다. 불장난을 하다 어머니에게 걸린 아이처럼 수정은 깜짝 놀래며 고개를 돌렸다. 두 번째로 그 남자와 눈을 마주친 것이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사춘기 소녀처럼 가슴이 콩콩거리며 뛰었다. 어쩌면 얼굴까지 빨개졌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여종업원이 내주는 잔돈을 챙긴 뒤에 서둘러 카페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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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은 회사를 그만 두었다. 회사는 여전히 어수선했고,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를 소문들이 퍼져 갔다. 아마 그녀가 회사를 갑자기 그만 둔 사실을 놓고도 이러쿵저러쿵 떠들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이 싫어졌다. 말 많은 사람들이 짜증날 정도로 미워졌다.
 
  행복 카페의 분위기는 여전히 그녀를 편안하게 대해주었다. 며칠 동안 오지 않아서인지 꽤나 오랜만에 오는 것 같다. 그녀의 지정 테이블은 어김없이 빈자리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카페 문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문이 열리고 그 남자가 나타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커피가 놓여지고, 카페에 흐르던 음악이 그치고 다음 곡이 흘러나올 때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그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아니면 오늘은 오는 날이 아닌가? 차가 막힌 것일까?’
 
  자신이 그 남자에 대해 왜 그렇게 신경을 써야하는 지 의문이 생겼다. 마치 사춘기 소녀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사춘기 때 그녀는 한 선생님을 짝사랑했었다. 그렇게 멋있는 차림도, 잘생긴 얼굴도 아니였지만, 그 모습에서 풍기는 포근함이 좋았다. 그 때문에 그 선생님 시간이면 멍하니 얼굴만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 시간이 그녀에게는 편안한 시간이었다. 어쩌면 행복 카페에서 본 그 남자에게서 짝사랑했던 선생님의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편안함이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왠지 그 남자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는 놀라며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청바지를 입은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그녀는 적지 않게 실망을 했다.
 
  ‘오늘은 오지 않으려나.’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입구 쪽을 계속 힐끔 거렸다. 그 남자가 늘쌍 앉던 자리도 쳐다보았지만, 그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앉아 있을 리가 만무했다.
 
  ‘우스워.’
  갑자기 그런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남자를 이렇게 초조해 하며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다. 만일 선화가 옆에 있었다면 깔깔거리며 비웃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을 잊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아닌가.
 
  그녀는 내일부터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당장은 사람들과 만나는 걸 피하고 싶었다. 며칠 동안 혼자서 지내고 싶어졌다. 그녀는 내일부터 그림을 그려보기로 결심했다.
 
  시간이 지나 카페를 나올 때까지도 그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 번에도 그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가을이 점점 깊어져 가는지 바람이 쌀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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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을 그릴 때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생각이 오직 한 곳으로 집중하기에 잡념이나 고민거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래서 울적해지면 그림을 그리곤 했었다. 물론 사춘기 때 이야기다. 사회 생활에 뛰어들고 나서는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다.
 
  모처럼 그녀는 화방에 들려 스케치북과 스케치용 연필, 포스터 컬러와 붓, 그리고 팔레트를 구입했다.
 
  그녀는 무엇을 그릴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선화의 얼굴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선화의 활짝 웃는 얼굴을 좋아했다. 행복한 그녀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녀는 선화와의 추억들을 다시금 꺼내 보았다.
 
  “선화야, 너 언제 애인 소개시켜 줄 거야?”
  “아직이야, 아직. 좀더 기다려 봐.”
  “언제까지 뜸 들일 거야?”
  “원래 뜸이 들어야 맛있는 거 아니겠어?”
  수정이 피식 웃었다.
  “남자가 무슨 밥이니? 뜸을 들이게.”
  선화가 까르륵 웃었다.
  “내 애인은 내 밥이야.”
  선화가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다시 돌아와 옆에서 까르륵 웃어줬으면 좋겠다.
 
  오늘은 유난히도 보고픈 얼굴이 많았다. 행복 카페에 나타나던 그 남자의 얼굴도 보고 싶어졌다.
 
  ‘어제는 왜 나오지 않았을까? 오늘은 나오지 않을까?’
  그녀는 스케치용 연필을 휘저으며 남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자신과 관계없는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자재를 해보지만, 그럴수록 더 보고 싶어졌다. 막상 만난다 해도 말을 걸거나 하는 행동은 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냥 멀지감치에서 얼굴만 바라보고 싶다. 선생님을 짝사랑하던 사춘기 소녀처럼 말이다.
 
  ‘조금 있다가 카페에 가볼까? 아니야,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잖아.’
 
  그녀는 잡념을 버리고 그림에 집중하려고 했다. 사춘기 때만 해도 그림에 몰입을 하면 잡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선화의 얼굴과 그 남자의 얼굴이 교차되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했다.
 
  그녀는 자신이 스케치한 그림을 보고는 화들짝 놀랬다. 스케치북에는 끔찍한 얼굴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화의 활짝 웃는 얼굴에 그 남자의 무표정한 모습이 겹쳐진 채로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내 젖고 말았다. 마음이 혼란스러워 졌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결심을 했는지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런 뒤 곧장 행복 카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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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있는 여종업원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카페 주인이 전부였다. 그녀가 밀레의 그림이 걸린 테이블에 앉자마자 여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기다렸다. 그녀는 커피를 시키고 나서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지만, 그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 참을 기다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좀더 기다려 보자 했지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그 남자는 모습을 들어내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한 숨을 내쉬며 카페를 쓸쓸하게 나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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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행복 카페로 향하던 수정은 깜짝 놀라며 발걸음을 우뚝 세웠다. 선화를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았다. 거기에는 쇼윈도우에 화려한 옷을 과분하게 입고 있는 마네킹이 서 있었다. 수정은 쓸웃음을 지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은 선화가 즐겨 입는 외출복이었다. 문뜩 선화의 집에 가 본 지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로 향하던 그녀의 발걸음은 선화가 살던 곳으로 방향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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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화의 어머니는 다정하게 수정을 반겨 주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이니 만큼 딸 생각이 나서인지도 모르겠다. 수정은 오다가 사온 귤을 내밀고 나서 인사말을 했다. 어머니의 눈이 글썽이는 것을 보자 그녀 역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선화의 어머니는 그만 가보겠다는 수정에게 점심을 같이 하자며 권했고, 수정은 못 이기는 척 하며 수락했다.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가 있는 동안 수정은 선화가 지내던 방으로 들어갔다.
 
  선화가 즐겨 쓰던 향수 냄새가 아직도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즐겨 입던 옷도 아직 옷걸이에 걸려 있었고, 만화책과 서적들도 고스란히 있었다. 그녀는 정겨운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선화의 어머니가 딸 생각에 방 정리를 하지 않고 그냥 둔 모양이다. 세상을 떠난 지 벌써 한달 가까이 지났는데도...... 수정은 어머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앨범을 꺼내었다. 그 안에는 선화의 다양한 모습들이 담겨져 있었다. 학창 시절 때도 선화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의 사진도 있었고, 대학 생활 때 같이 찍은 사진도 있었다. 갓 사회인이 되어 즐거워하던 모습도 있었다.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수정은 다시금 추억을 더듬을 수 있었다. 눈물이 글썽여 졌다. 생각할수록 보고 싶고 그리운 친구였다. 다시 살아났으면 하는 바램을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다시금 하게 된다.
 
  앨범의 마지막 장에는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이 꽂혀 있었다. 그 중 한 장은 반으로 오려진 상태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일부러 가위질한 사진이었다. 2명이 같이 찍은 사진이었는데, 선화의 모습만 있을 뿐, 나머지 1명의 모습은 가위로 깔끔하게 오려져 있었다. 선화의 어깨에 올려진 팔만이 오려져 나간 사람의 정체를 암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선화의 옆에 있는 사람은 남자가 틀림없었다. 남자 양복을 입은 팔이었기 때문이다.
 
  ‘선화의 애인인가? 왜 오렸을까?’
  수정은 앨범을 다시 뒤적여 보았지만, 오려져 나간 남자의 정체를 알만한 사진은 없었다. 남자와 찍은 사진이 몇 장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대학 동창이거나 회사 직원이었다.
 
  문뜩 선화의 장례식이 떠올랐다.
  선화에게 애인이 있었던 건 확실했다. 그런데 선화의 장례식 때 낯선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회사 동료와 그녀의 친척들 뿐, 선화의 애인은 모습을 들어내지 않았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회사 동료 중에 애인이 있는 것일까?
 
  수정은 선화가 죽기 며칠 전부터 뭔가로 괴로워하는 걸 생각해 냈다.
 
  “너 어디 아파?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응, 아무 것도 아냐.”
  활기차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자 수정은 걱정이 되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응. 감기 기운이 있어서 그런가 봐. 걱정하지마.”
  생각해 보니 감기는 아닌 것 같았다. 뭔가로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바보같이 그 때는 왜 못 알아차렸을까?’
  선화는 분명 남자 친구와 헤어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렇게 괴로워했던 것이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래서 같이 찍은 사진도 오려낸 것이다.
  ‘불쌍한 계집애. 나에게라도 이야기를 했었더라면......’
  눈물이 앨범 위로 떨어졌다. 남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의 선화 심정을 상상하니 가슴이 아파 왔다. 그와 더불어 그 남자 친구에 대한 복수심도 커져갔다.
 
  ‘도대체 어떤 남자일까? 어떤 남자이기에 선화를 괴롭게 만든 것일까?’
 
  하지만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오려진 사진 조각은 태워 버렸을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 해서든 그 남자를 찾아내어 선화를 가슴 아프게 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이......
 
  수정은 선화의 비밀 장소가 떠올랐다.
  예전부터 선화는 책꽂이 뒤편에 자신의 비밀 장소를 만들곤 했었다. 수정은 책꽂이 쪽으로 다가가 책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과연 백과사전 뒤편에 조그만 공간이 있었다. 그녀는 두터운 백과사전을 꺼내고는 뒤편에 있는 공간에서 자그만한 노트를 발견했다. 선화의 일기장이었다.
 
  선화의 어머니가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일기장을 핸드백 속에 넣고는 백과사전을 원래 자리로 꽂아 놓았다. 그리고 나서 방을 나왔다. 그녀의 가슴은 콩콩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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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 카페는 변함없이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종업원과 카페 주인, 그리고 두어 명의 손님들이 카페 안을 채우고 있었다. 배경 음악으로는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이 잔잔히 깔리고 있었다. 그 음악이 밀레의 ‘만종’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수정은 자리에 앉았다.
 
  선화의 어머니로부터 얻어먹은 점심 때문인지 배의 포만감이 잠을 유도했다. 수정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야 핸드백에서 일기장을 꺼냈다. 일기장을 펼쳐보기 전에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일기장을 훔쳐본다는 것이 찜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화를 아프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수정은 선화를 위하는 일이라 자신을 달래며 일기장을 펼쳤다.
 
  카페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던 수정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바로 그 남자였다. 이유도 없이 친밀감이 느껴지던 바로 그 남자였던 것이다. 수정의 가슴은 묘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언제나 앉던 자리에 앉은 뒤, 마티니를 시켰다. 손에는 여전히 신문을 들고 있었다. 수정은 자신이 그 남자를 향해 정면으로 얼굴을 돌린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다행스럽게도 남자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듯 싶다. 남자는 신문을 들여다보며 마티니를 마시고 있었다.
 
  수정은 바보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힐끔 고개를 돌린 수정은 다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남자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동그래진 눈동자로 남자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빨려들 정도로 맑은 눈동자였다. 먼저 눈길을 피한 것은 남자였다.
 
  남자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수정은 빨개진 얼굴을 숙인 채 일기장에 눈을 고정 시켰다. 일기장의 글씨들은 더 이상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느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남자 역시 그녀 쪽으로 가끔 시선을 던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용기 있게 고개를 돌려 남자를 똑바로 보고 싶었다. 당당하게 그 눈길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선화가 옆에 있었다면 바보 같다고 놀렸을 것이 틀림없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생각도 못한 채 그렇게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무 바보 같애. 도대체 왜 저 남자에게 관심이 가는 것일까? 그리고 저 남자는 왜 자꾸 나를 바라보는 거지?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일까? 말을 걸면 어떻게 해야 하지?’
 
  수정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남자는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용기가 생겨 계속 남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지만 남자는 고개 한 번 까딱이지 않았다.
 
  “휴우.”
  알 수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자신이 엉뚱한 상상 속에서 허부적 거렸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현실로 돌아오려 애썼다. 그녀는 선화의 일기장에 몰입하려 했다.
 
  남자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수정은 살짝 고개를 돌려본다. 일어난 남자는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니 그렇게 느끼고 싶었다. 남자는 계산대 옆에 놓여진 전화기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한다.
 
  ‘애인이 있는 것일까?’
  작은 질투심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전화를 하던 남자가 갑자기 시선을 그녀 쪽으로 옮겼다. 수정은 눈길이 마주치려는 찰라에 고개를 외면했다. 가슴은 여전히 콩당콩당 뛰고 있었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그 남자에 대한 집착이 커진 것 같다.
 
  그녀는 일기장을 핸드백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이 자리에 있다가는 가슴이 터져 버리거나 남자가 말을 걸어올 것만 같았다.
 
  전화기는 계산대에 있었고, 그녀는 계산대를 향해 걸어갔다. 남자에게로 점점 다가감에 따라 걸음걸이가 굳어졌다. 남들이 보면 목각 인형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뻣뻣해진 몸을 겨우겨우 가누며 계산대에 도착했다. 여종업원이 커피 가격을 말했고, 수정은 지갑을 꺼내 요금을 치렀다. 남자가 바로 옆에 서있었다. 그 남자의 눈길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잔돈을 받은 뒤 황급하게 카페를 벗어났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쓰다듬자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카페 앞에 선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당장 문을 열고 쫓아오리라 생각했던 자신을 바보스럽게 여겼다. 남자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쓸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선화야, 난 왜 이렇게 바보 같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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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수정은 외출복을 벗어버리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방금 전 카페에서 있었던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은, 생각하면 할수록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책망했다. 아무 관계도 없는 남자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샤워를 하며 그 일을 잊으려 했다. 개운해진 탓인지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일기장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작고 귀여운 글씨는 선화의 웃는 얼굴과도 같았다. 그녀와 주고받았던 대화들, 영화 내용,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의 소문들이 재미있게 씌어져 있었다. 그리고 선화를 아프게 만든 남자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그는 다정하고, 친절했어. 오늘 저녁 식사는 낭만적이었고, 그의 좋은 매너를 흠뻑 느낄 수가 있었지......”
 
  수정은 꼼꼼하게 ‘그’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서술한 부분을 찾기 시작했다.
 
  “......내 모든 걸 그에게 주었어. 마음과 몸 모두를 말야. 이제는 내 목숨마저도 그에게 바치고 싶어. 이런 마음이 바로 사랑이라는 건가봐. 한없이 즐겁고, 길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그가 바로 내 사랑이라고 떠들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걸. 수정이에게 조차 비밀을 지켜야 하니까 말야. 하지만 그래도 난 행복해. 그가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정은 마지막 대목에서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선화가 사랑했던 남자에게 질투심 마저 느껴졌다.
 
  “......오늘 병원에 갔어. 의사 선생님이 삼개월이라고 하드라. 솔직히 난 즐거웠어. 속도위반이기는 하지만 그와의 사랑으로 인해 한 생명이 태어나는 거잖아. 즐겁고 행복한 일이 틀림없어. 그도 분명 좋아할 거야. 내일 이야기 해 줘야지......”
 
  수정은 날짜를 확인했다. 한 달하고도 이주일 전 일기였다. 선화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었는데......
 
  그녀는 다음 날 일기로 넘어갔다.
  “......슬프다. 정말 슬프다. 기뻐한 만큼 슬픔도 크다. 그냥 이대로 죽고 싶은 뿐이야. 나의 배속에서 숨쉬고 있는 아이를 죽이느니 나를 죽이고 싶어. 그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아냐, 어쩌면 진심이 아닐지도 몰라. 그가 그토록 냉정한 사람일리 없어. 그는 나를 사랑해. 그의 아이를 죽일 수는 없어. 내일이면 그가 미안하다며 오늘 한 말을 취소할 거야. 틀림없이......”
 
  수정은 눈물이 났다. 선화가 그 때 얼마나 슬펐는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나쁜 놈.’
  남자는 틀림없이 아이를 지우라고 했을 것이다. 선화는 남자를 정말 사랑했는데, 남자는 냉정하게 그 사랑을 짓밟았던 것이 틀림없다. 수정은 남자에 대한 분노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다음 일기로 넘어갔다. 그 일기가 마지막 일기였다. 그 일기에는 선화가 남자를 만나 출산에 대해 실랑이를 한 내용이 슬프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얼굴이 담겨져 있었다. 오린 듯한 사진조각 위에는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앨범에서 보았던 오려진 사진이 떠올랐다.
 
  수정은 남자의 얼굴을 보고 크나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머리가 텅 빈 채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믿을 수 없어. 선화의 애인이 그였다니......’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수정은 소리내어 울었다. 선화가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이 그였다니. 믿겨지지 않는 사실에 수정은 놀라고 터무니 없어하면서도 선화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선화의 아픔이 그대로 가슴에 전달되어 졌다. 수정은 그렇게 한없이 펑펑 울었다. 슬픈 영혼이 되어 버린 친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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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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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지금 행복 카페의 한 테이블에 앉아 있다. 테이블 위에는 마티니가 놓여 있고, 손에는 들어오기 전에 산 신문이 들려 있다. 그는 신문을 펼쳐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기사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만 머리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눈은 신문을 향했지만, 머리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어떤 여자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치렁치렁 길었으며, 얼굴 윤곽이 확실히 드러나는 게 예쁘기보다는 귀여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혼자 테이블에 앉아 있었으며, 테이블에는 커피가 한 잔 놓여 있었다. 그녀는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친구가 죽었기 때문이겠지.’
  그는 그녀의 슬픈 눈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오랫동안 그녀의 눈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그녀가 고개를 들지 몰라서였다. 가급적이면 그녀와 눈을 부딪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얼른 카페 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의외로 조용한 카페였다. 전체적인 장식이나 분위기는 차분한 느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별로 없었다. 아마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인가 보다 하고 그는 짐작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손님이 별로 없는 건 그에게 있어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그는 주의를 잠깐 사이에 휙 둘러보았다. 카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카페 구석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고, 종업원 아가씨는 빈 테이블에서 소설책을 탐독하고 있었다. 몇 개의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말소리가 작아 들리지는 않았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조금은 안심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며, 다시 그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갑자기 그녀가 활짝 웃었다. 마치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난 것처럼 그녀는 웃음을 보였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뜻밖의 표정을 쳐다보았다.
 
  ‘친구의 죽음에 충격이 컸나 보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주시했다. 그녀의 얼굴에 잠깐 피었던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추억과 현실로 인해 갈등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그녀에게 향했던 눈길을 거두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안쓰럽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 이상의 감정은 없다.
 
  그는 앞에 놓인 마티니를 홀짝였다. 이 카페에서 처음 마시는 마티니의 맛은 그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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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카페에서 두 번째로 마시는 마티니 역시 그저 그랬다. 다른 곳의 마티니와 비교해서 특별난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마티니를 홀짝이며 힐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시켜놓고, 추억에 잠겨 있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그녀의 모습을 잠시잠시 바라볼 뿐 아무런 감정도 들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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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그녀는 이 카페에 깊은 추억이 있는 것 같다. 벌써 세 번째 이 카페를 찾고 있다. 다른 카페에는 가지 않았고, 이 카페만을 찾았다. 그녀는 혼자 이 카페를 찾았고,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늘 커피만을 시켰다. 그리고 슬픈 눈동자를 하고, 깊은 추억에 잠긴다.
 
  그 역시 마티니를 시켜 놓고, 신문을 펼쳐 든 채 가끔 그녀를 관찰했다. 처음이나 두 번째처럼 그녀의 모습은 항상 같았다. 슬픈 표정에 추억에 잠긴 눈동자, 고독하고 우울한 모습이 그녀의 몸에서 배어 나오고 있었다.
 
  마티니가 도착하자 그는 한 모금 마셨다. 마티니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커피나 음료, 아니면 차 같은 것보다는 차라리 알콜이 섞인 칵테일이 낫겠다 싶어시킨 것뿐이다. 마티니는 그가 아는 유일한 칵테일이었다. 다른 걸 시켜볼까도 했지만,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칵테일의 맛을 측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옆자리에 앉은 어떤 여자가 커피를 시켰나 보다. 여 종업원이 커피를 들고 그의 앞을 지나는 순간 행동이 주춤거렸다. 발을 헛디딘 모양이다. 여종업원의 손에 들려져 있던 쟁반이 흔들거리고, 위에 놓여진 커피 잔이 휘청 였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진 커피가 흘러 넘쳐 그의 옷으로 날아들었다.
 
  쏟아진 커피는 소량이어서 날아드는 사이에 뜨거움이 어느 정도 식혀져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여종업원은 느닷없이 일어난 일에 허리를 굽히며 사과를 했다. 놀란 카페 주인도 급히 달려와 사과를 했다.
 
  놀란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예측하지 못했던 작은 소동에 당황스러웠다. 이 예기치 못했던 소동으로 인해 카페 안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목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서둘러 소동을 없애려고 손으로 괜찮은 시늉을 해 보였지만, 여종업원이나 카페 주인은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그는 힐끔 그녀의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순간 그녀의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아뿔싸 하는 사이에 그는 고개를 외면했다. 커피가 갑자기 쏟아진 것 보다 더 큰 놀라움이 그의 심장을 고동치게 한 것이다. 그는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소동은 다행스럽게도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안정을 되찾았고, 그에게 관심을 보이던 그녀의 시선 역시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과히 좋지 만은 않았다.
 
  ‘나의 존재를 기억하진 않겠지.’
  지금 일어난 작은 소동은 카페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므로 그녀가 자신을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그도 일어날 준비를 했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자신이 마신 마티니 잔을 깨끗이 닦았다. 손수건을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하자 여종업원이 사과의 뜻으로 요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아무런 의미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카페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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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스럽게도 그 때의 작은 소동을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다시 행복 카페를 찾았을 때, 그녀는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그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내심 안심을 하며 마티니를 홀짝 였다.
 
  그녀는 항상 같은 패턴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8시에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간다. 퇴근 시간은 6시로 정해져 있지만 정각에 퇴근하는 일은 없다. 회사가 어수선한 탓에 그녀처럼 일반 직원들은 일찍 퇴근한다. 퇴근 후 그녀는 곧장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간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이후로 그녀의 평일날 생활은 늘쌍 그러했다. 가끔 이 카페를 찾는 것 빼고는 다른 곳에 일체 가지 않는다. 주말 역시 대부분 집에서 보낸다. 간혹 거리를 나와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만 약속이라든가 쇼핑을 위한 외출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추억이 서려있는 장소를 배회하는 것 같았다.
 
  그는 슬슬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회사에 있거나 집에 있을 때도 항상 그녀를 지켜보아야만 했기에 그 지루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루하다고 해서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짜증을 낸다고 해서 지루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종업원의 실수로 인한 작은 소동이 있은 후로 몇 번 더 그녀를 관찰했지만, 그가 기대하던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주시하던 일도 삼주일 째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는 슬슬 그녀를 주시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는 다시금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잠깐 동안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그녀의 테이블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산대에 있었고, 시선은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동안이었지만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중에서 그를 가장 난처하게 한 것은,
 
  ‘그녀가 나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
  라는 것이었다.
  그가 서둘러 시선을 돌리려는 찰라에 그녀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황급히 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그는 느낄 수가 있었다.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카페 문만이 흔들리고 있었다. 황급히 나갔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증거였다.
 
  ‘빌어먹을.’
  그는 자신이 초보적인 실수를 했음을 인정했다.
  그녀가 계산대에서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나간 이유는 하나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때의 작은 소동 이후로 그의 존재를 의식했던 것이다.
 
  그는 평소처럼 그녀의 뒤를 밟지 않고, 그 자리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거의 삼주일 동안 그녀를 미행했다. 미행이 그의 전공은 아니었지만, 미행이 서툴지는 않았다. 거리에서의 미행은 완벽했다고 그는 확신했다. 이 카페에서 그녀를 관찰하는 것 역시 철저했다고 자부했다. 사람의 눈에 평범하다는 인상을 주는 갈색의 정장을 입음으로써 쉽게 잊혀지는 스타일의 옷차림을 했고, 특별나게 눈에 띄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때의 작은 소동만 없었다면 그녀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소동을 크게 생각하지 못한 건 그의 잘못이었다.
 
  더 이상 그녀를 미행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삼주일 동안의 미행 결과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카페 안에 마련된 전화기로 갔다. 동전을 넣고 어떤 번호를 눌렀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한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조금은 콩맹맹이 목소리여서 듣기가 좋지만은 않았다. 그는 보고할 내용을 말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보고할 내용은 별로 없었다. 보고를 마친 뒤에 그는 이제 그만 해도 되겠다는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상대방은 잠시 생각하는 듯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음,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는군요. 그럼 이제 미행은 그만 두도록 하세요. 나중에 제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의 일은 이제 모두 끝난 것이다. 이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 일은 나름대로 힘든 부분도 있었다. 하긴, 그가 하는 일에 쉬운 것이란 있을 수가 없지만.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오늘밤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카페를 나와 편의점에 들려 위스키 몇 병과 마른안주를 산 뒤, 근처 여관을 잡았다. 그리고, 여관 주인에게 여자를 부탁한 뒤, 위스키를 홀짝였다. 일을 모두 마치고 나서인지 술이 잘 받았다. 잠시 후, 부탁한 여자가 들어오자 곧장 옷을 벗어 던지고 육체의 쾌락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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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눈을 떴다. 신경을 건드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후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파리똥인지 낙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검은 반점들이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낡은 목재 가구와 그나마 깨끗한 TV, 낙서로 가득한 벽과 맑은 거울, 수건은 축축하게 젖어 있고, 1회용 면도기는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다. 그는 그런 것을 외면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욱신욱신 아프다. 어제 과음을 한 탓이다.
  그는 양손을 올려 안마하듯 머리를 매만져 보지만 두통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위장마저도 쓰라린 고통을 전달해 주었다. 목안도 유난히 칼칼하여 피라도 토할 것 같았다. 눈은 모래가 한 뭉큼이나 들어간 듯 따끔거렸다. 온 몸이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그는 잠자리 옆에 놓아든 물병을 들고 몇 모금 들이켰다. 미적지근한 물이 목안의 칼칼함을 조금은 해소 시켜주었다. 머리도 어느 정도 나아졌다. 위장만 어떻게 하면 견딜 만 할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잠을 깨운 삐삐를 잡고 들여다본다. ‘0101’이란 번호가 찍혀 있었다. 그는 그 번호가 누구에게 온 것인지 알고 있었다.
 
  더듬더듬 시계를 찾아 시간을 본다. 오전 10시 40분이 막 넘어 있었다. 그는 눈을 끔뻑거리며 눈의 따끔함을 해소시키려 애썼다. 그런 뒤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세면대로 향했다.
 
  일부러 뜨거운 물 대신 찬물에 머리를 감고 얼굴을 닦았다. 찬 기운이 집중적으로 자극하자 머리가 맑아졌다. 그는 세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잘 생기지도 못 생기지도 않은 그저 그런 얼굴이다. 원래 나이에 비해 약간 늙어 보인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렇게 흠 잡을 만한 얼굴도 아니었다.
 
  그는 이 여관에 며칠동안 있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이 여관에 머물면서 여자를 다섯 번 불렀으니 5일 동안 있었던 셈이 된다.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다 보니 날짜 감각이 둔해졌다. 긴장이 풀리면 늘쌍 이런 식이었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술과 여자를 멀리하는 그의 습성 때문에 일을 마치면 참았던 것들을 한순간에 폭발시켜 버린다.
 
  정신을 차린 그는 방안에 있는 전화기를 이용해 이미 익숙해진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갔고, 듣기 거북한 코맹맹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동안 그녀의 뒤를 더 미행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의 눈썹이 치켜져 올라갔다. 그는 다시 그녀의 뒤를 쫓아다니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더이상 미행해 봐야 별다른 결과가 없을 거 같은데요.”
  “그녀가 회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갑자기 그만 둘 이유가 없잖겠습니까?”
 
  “친구의 죽음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이왕이면 신중하고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보수는 두둑히 드릴 테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결국 그는 상대방의 부탁을 승낙하고 말았다.
  ‘신중하고, 확실하게? 그게 아니라 무섭고, 초조해서겠지. 성격이 너무 말랑말랑한 남자야. 그래서야 어디 큰일을 하겠나.’
 
  그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싫은 일이긴 했지만 승낙한 이상 어영부영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옷을 다 입은 뒤에 잊은 것이 없나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 여관에서 더 이상 머무를 일이 없기에 마무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였다. 잊은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그는 방을 나왔다.
 
  여관 주인은 자고 있는지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 여관에 61점이라는 점수를 주고, 미련 없이 거리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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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를 그만 둔 이상 그녀는 집이 아니면 행복 카페에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는 공중전화로 그녀의 집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수화기를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녀는 집에 있었다. 그는 그녀의 집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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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원룸에 살고 있었다. 대학가 주변이라 원룸 아파트와 더불어 카페와 술집, 비디오방이 주의에 널려 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원룸의 맞은편 건물 역시 그런 것들이 즐비했고, 그곳에서 그녀를 감시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2층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창 문 너머로 그녀의 원룸 입구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작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볼륨을 높였다. 찌지직 하는 노이즈만이 들려왔다. 그는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대만에서 밀수입한 이 장비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10미터 이내에서의 도청은 확실한 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방안에서 말을 하는 경우가 없었으므로 도청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 역시 그녀가 움직이는 기척만 가끔 들릴 뿐,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창 문 넘어 원룸 입구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예상대로 그녀가 외출복을 입은 채로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어폰을 주머니에 넣고, 손수건으로 자신이 마신 컵을 닦은 뒤 여유 있게 카페를 나왔다.
 
  예상처럼 그녀는 행복 카페로 향하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한참 뒤에서 그녀를 여유롭게 따라갔다. 갑자기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쇼윈도우를 쳐다보았다. 그는 걷던 속도를 늦추고 그녀가 바라보는 쇼윈도우로 시선을 돌렸다. 화려한 옷을 입은 마네킹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녀는 한동안 그 마네킹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향이 틀렸다.
 
  ‘무슨 일이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바뀐 탓이리라. 그는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가 행복 카페 외에 다른 곳에 가리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화의 집에 가려는 것인가 보군.’
  그녀를 계속 따라가던 그는 그녀가 가려는 장소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 역시 그 곳은 낯선 곳이 아니었다. 두어번 선화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그녀는 선화의 집을 방문했고, 그는 밖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주택가였기 때문에 지나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혹시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몰라 집을 찾는 시늉을 하며 거리를 왔다갔다했다.
 
  ‘갑자기 왜 이 곳에 온 것일까? 분명 행복 카페로 향하던 중이었는데. 친구가 생각나서 일까? 아니면 어떤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지금 당장은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1시간 정도 후에야 집을 나왔다. 그는 다시 그녀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그의 예민한 눈에는 그녀의 발걸음이 들어갈 때와는 달리 조금 빨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역시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행복 카페로 향했다. 그는 카페로 따라 들어가기 전에 신문을 하나 샀다. 신문 기사를 읽기 위한 것은 분명 아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녀를 감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카페로 들어섰다.
 
  카페 안은 언제나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고, 늘쌍 앉던 그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는 버릇처럼 그 자리에 앉았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마티니를 주문했다. 신문을 펼쳐 든 그는 곁눈질로 그녀가 언제나 앉는 그 자리에 있음을 확인했다. 테이블에는 여전히 커피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커피 외에 책 같은 것도 함께 있었다. 뜻밖의 일이었다. 여태껏 이 카페에서 그녀가 책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책이지? 책이라기 보다는 노트 같은데?’
  그녀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주시하는 느낌이 들어 그는 신문에 시선을 고정 시켰다.
 
  ‘역시 내 존재를 의식하는 것 같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확실히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는 확신이 섰다. 먼젓번처럼 당혹함이 밀려왔다. 그는 그녀가 시선을 거둔 것 같아 고개를 들어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보다는 테이블에 있는 노트 같은 것에 시선을 옮긴 것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세 번째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모든 것이 엉망으로 변해 버린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빌어먹을. 내 존재를 역시 의식하고 있어. 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몇 번 본 얼굴이기 때문에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그건 그렇고, 저 노트는 뭐지? 글씨가 분명 인쇄체는 아니었어. 손으로 쓴 글씨였어. 메모장인가? 아니면 일기장 같은······.’
 
  갑자기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평소 그녀는 이 카페에서 책이나 메모장 같은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이 카페에 오기 전 그녀는 선화의 집에 들렸었다.
 
  “선화의 방을 조사해 주세요. 메모장이나 일기장 같은 것에 있을지 모릅니다.”
 
  일기장!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분명 선화의 일기장이 틀림없다! 그의 심장이 작게 두근거렸다. 드디어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그는 정말 일기장인가 하고 다시금 힐끔거렸다. 일기장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보면 볼수록 일기장으로 보였다.
 
  ‘빌어먹을. 역시 알려 주는 게 좋겠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 옆에 있는 전화기로 향했다. 버튼을 누른 후,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그녀 쪽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외면하는 모습이 보였다. 전화를 거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더 이상 정체가 드러나기 전에 일을 서둘러 마치고 싶었다.
 
  콩맹맹이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는 그녀가 선화의 집을 방문한 것과 카페에서 일기장 같은 걸보고 있다는 걸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는 사이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가려 했다. 그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미행을 그만 두기로 했다. 이미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알게 된 그녀의 뒤를 계속 미행하는 건 의심만 더 줄뿐이라는 결론에서 였다. 그녀는 카페를 나갔고, 콩맹맹이 목소리는 초조한 음성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선화의 일기장이 확실합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확인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밤에 확인해 볼 계획입니다만······.”
 
  “서둘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일기장이 확실하다면, 어떻게 할까요?”
 
  “애초 계획대로 해주십시오.”
  “그러지요.”
  그는 전화를 끊고, 카페를 나왔다. 그것이 일기장이 확실하다 해도 아직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우려하던 내용이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하튼 오늘 밤 그것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녀가 사는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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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살고 있는 원룸 근처를 서성이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였지만,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샤워를 하는 듯 물소리가 작게 들렸다. 잠시 뒤에 물소리가 그치고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어떤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흐느끼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정신을 집중시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TV에서 나는 소리인지, 그녀가 우는소리인지 확실치가 않았다. 그 흐느낌은 오래 지속되었다. 꽤 많은 시간동안 그 흐느낌은 이어폰으로 흘러 나왔다. TV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고 단정 지울 수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녀의 울음이었다. 그녀의 친구가 죽고 나서 며칠동안 그녀는 울기만 했었다. 여자의 울음소리는 언제나 기분을 유쾌하지 않게 만든다.
 
  밤이 깊어지자 울음소리도 그쳤고, 그녀의 창문도 어두워졌다.
  그는 24시간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하나 사들고, 조금 떨어진 거리를 배회하며 홀짝이기 시작했다. 나이트 클럽, 단란주점, 노래방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젊은 사람들이 그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지루한 몇 시간이 흘렀다. 그는 배회를 마치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몇 명의 사람들이 그 근처를 오가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얇은 고무장갑을 꺼냈다. 수술에 사용하는 손에 착 달라붙는 그런 장갑이었다. 장갑을 낀 그는 발목에 있는 물건을 슬쩍 확인해 본 후, 원룸 안으로 당당하게 몸을 들이밀었다.
 
  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 문은 잠겨져 있었다. 통로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 지갑에서 2개의 얄팍한 도구를 꺼내었다. 그 도구를 이용해 자물쇠를 푸는 건 약간의 시간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어스름한 달빛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침대에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 감상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서둘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책상부터 뒤졌다.
  생각보다 쉽게 그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책상 서랍에 그녀가 카페에서 보고 있던 것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손전등을 켜고 내용을 훑어보았다. 분명히 선화의 일기장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뒤척이고 있었다. 그는 여차하면 발목에 손을 갖다댈 준비를 한 채 그녀를 주시했다. 그녀의 뒤척임이 멎었다. 그는 작은 숨을 내쉬고는 일기장을 빠르게 훑었다.
 
  만일 걱정하는 내용이 없다면 일기장을 원래 자리에 두고 나와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것이 있다면 상황은 틀려진다. 솔직한 심정으론 그것이 나오지 않기를 바랬다. 괜스레 위험한 짓을 또다시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기장의 마지막 부분에 우려하던 것이 나오고 말았다. 오린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이 담긴 사진조각이 일기장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사진이 여기에 있었다니? 그런데 이 일기장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내가 선화의 방을 뒤졌을 때는 없었는데. 흠, 비밀 장소가 있었던 건가? 여하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사진이 나온 이상 더 이상 생각해 볼 것도 없어. 저 아가씨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수정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자고 있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는 사진을 일기장에 꽂고, 일기장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발목에 차고 있는 예리한 군용 칼을 꺼내었다. 숨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무언가 하얀 것이 그의 시야 끄트머리에 걸렸다. 그는 흠칫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달빛을 받아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스케치북이었다. 그는 스케치북 위에 그려진 그림을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여자의 얼굴과 남자의 얼굴이 중첩된 묘한 그림이었다. 여자의 얼굴이나 남자의 얼굴 모두 익숙한 느낌이어서 좀더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여자의 얼굴은 선화가 틀림없고, 남자의 얼굴은 놀랍게도 그의 얼굴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작게 일그러졌다.
 
  ‘역시 내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어. 내 얼굴을 그려서 경찰에라도 가져갈 생각이었나?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
 
  그는 스케치북을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는 아직도 그가 옆에 있는 걸 모른 채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오른손으로 군용 칼을 그녀의 복부에 세게 쑤셔 넣는다.
 
  갑작스런 충격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눈을 바라본다. 하지만 초점은 없다. 그녀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오른손에 잡은 칼을 더욱 깊숙이 쑤셔 넣는다. 그녀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는 그의 왼손에 의해 차단된다. 그녀가 팔을 뻗어 그를 제치려 한다. 죽어 가는 자의 힘은 범인(凡人) 보다 몇 갑절 위다. 그는 그녀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가기 전에 남은 목숨을 끊어버리기 위해 칼을 휘젓는다. 그녀의 내장이 예리한 칼날에 의해 뚝뚝 끊어지는 느낌이 오른손으로 전달되어져 온다.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그녀의 팔은 힘없이 떨어지고, 고개도 떨구어진다. 복부에 박힌 칼날을 아무리 휘저어도 반응이 없다. 그녀는 죽은 것이다.
 
  그는 옷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었다.
  이번만큼은 별 어려움 없이 쉽게 처리했다고 생각했다. 먼젓번 선화를 죽일 때와 비교하면 쉽게 끝난 것은 확실했다. 그는 복부에 박힌 칼을 힘있게 뽑았다. 칼끝에 피가 맺혀 있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 내고, 발목에 착용했다. 그의 칼 다루는 솜씨 때문인지 시체에선 피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시체를 내려다보며 그간 그녀의 뒤를 미행하던 일을 잠깐 떠올려 보았다.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대체로 지루했던 시간들이다. 별다른 재미도 없는 밋밋한 한달 간이었다.
 
  시체에서 눈을 뗀 그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침대 밑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뒤, 침대 밑에 붙여 놓은 소형 마이크를 찾아냈다. 대만에서 밀수입한 도청용 마이크였다. 그녀를 미행하기 시작할 무렵에 붙여 놓았던 것인데, 이제는 필요가 없으니 수거하는 것이다.
 
  그는 방안을 돌아다니며 옷장과 책상을 모조리 끄집어내. 옷가지를 방안에 훑어놓고, 책을 비롯한 잡동사니들을 어지럽게 널려 놓았다. 그 일은 짧은 시간에 익숙한 솜씨로 이루어졌다.
 
  ‘강도로 위장하는 일은 손쉬운 일이지.’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있는 스케치북과 일기장을 들고, 그녀의 방을 나왔다. 이제 모든 일이 속시원하게 끝난 것이다. 이제 그 코맹맹이에게 일기장과 사진을 넘기면 끝이라는 생각이 그를 안심시켰다.
 
  ‘당분간 대만이나 가서 쉬고 와야 할 것 같군.’
  그는 대만 아가씨들의 몸매를 떠올리며 유유히 그녀의 집 근처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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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맹맹이 목소리 - 의뢰자는 무척 조심스런 사람임에 틀림없다. 의뢰자는 어떤 회사 사장 외동딸의 남편이었다. 아마도 부인의 돈을 보고 결혼했을 것이다. 사랑으로 결혼했다면 회사 여직원과 바람을 피우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의뢰자의 첫 번째 부탁은 그의 정부인 선화라는 아가씨를 죽여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대강 짐작은 간다. 회사 사장이 병에 걸려 조만간 죽을 것이라는 소문은 그의 귀에도 들어왔으니까 말이다.
 
  의뢰자는 선화라는 아가씨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느니, 아내와 이혼하겠느니 하는 사탕발림으로 유혹했을 것이다. 순진한 선화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쉽사리 몸과 마음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던 찰라에 사장은 병에 걸려 오늘내일 하게 되었고, 선화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그에게 통보했을 것이다.
 
  사장이 죽으면 외동딸인 의뢰자의 부인이 전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 얍삭한 그로서는 임신했다는 선화가 끔직한 장애물이 된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선화가 부인에게 찾아가기라도 한다면, 질투심 많은 부인은 이혼을 요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뢰자는 막대한 재산을 잃게 된다.
 
  애초에 사랑이란 감정 따위로 만난 선화가 아니기 때문에 의뢰자로서는 그녀가 귀찮은 존재가 되버렸을 것이고, 처음에는 위자료를 주겠다는 말로 헤어지자고 타일렀을 것이다. 하지만 선화가 이를 거절하자 급한 마음에 자신을 찾은 것이라 그는 추측했다.
 
  선화라는 아가씨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순진이라는 무서운 죄를 가진 벌이라 생각할 수밖에.
 
  그는 교통사고를 위장해 그녀를 간단히 죽일 수 있었다.
  훔친 자가용을 이용해 그녀를 들이박았고, 뼈가 으드득 부러지면서 선화는 죽었다. 차에서 나와 죽음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녀의 몸을 차로 으깨버리고 그대로 달아났다. 물론 목격자는 없었다.
 
  다음 날, 신문을 통해 그녀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심스런 의뢰자가 두 번째 부탁을 해왔던 것이다.
 
  “선화와 같이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찍기를 거절했지만, 하도 보채기에 어쩔 수 없었죠. 만일 이 시점에서 그 사진이 발견되면 내가 곤란해집니다. 선화의 죽음이 사고였다 하더라도 그 사진이 발견되면 경찰은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게다가 집사람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지요. 내가 여직원과 같이 있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 사진을 찾아 주세요. 아울러 그녀가 일기장 같은 것에 내 이름을 남겼을지 모르니 그것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그는 선화의 집을 향했다. 익숙한 솜씨로 담을 넘고, 선화의 방을 찾아 들어갔다. 책상과 옷장, 서랍장과 책장을 모조리 뒤져보았지만 일기장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다이어리와 메모장에도 의뢰자의 이름 같은 건 없었다.
 
  앨범 속에서 오려진 사진을 한 장 발견했다. 그것이 의뢰자가 말한 사진인 것 같다. 꺼내어 의뢰자에게 주려 했지만, 공연한 짓 같아 그만 두었다. 의뢰자의 정체를 암시하는 단서가 있지 않은 사진을 굳이 빼낼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 였다.
 
  의뢰자에게 보고했지만, 조심스런 의뢰자는 혹시 모르니 다시 한 번 검색해 달라고 부탁했다.
 
  “차라리 그 방에 불을 내는 것이 어떨까요?”
  그가 의견을 제시했다.
  “안됩니다. 사고로 죽은 지 며칠 밖에 되지 않았는데, 사고 당사자의 방에 방화 사고까지 났다고 해보십시오. 경찰이 수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짜증나는 의뢰자이긴 했지만, 그 만큼의 대가를 약속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대꾸 없이 부탁대로 해주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선화의 절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수정이라는 아가씨인데 같은 회사 사람이죠. 그녀의 뒤를 며칠동안 미행해 주세요. 선화는 성격이 활달하기는 하지만 속마음을 잘 들어내지 않는 성격입니다. 그러니 나와의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절친한 친구에게 라면 모르죠. 수정이란 아가씨를 미행해서 나와 선화의 관계를 알고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그것이 의뢰자의 세 번째 부탁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보수 역시 많았다.
 
  그는 수정이란 아가씨도 죽이면 되지 않냐고 제의를 해 보았지만 의뢰자는 반대했다. 같은 회사 여직원 두 명 - 그것도 절친한 사이인 두 명 - 이 비슷한 시기에 죽는다면 사람들이 의심할 것이라는 이유에서 였다.
 
  “만일, 수정이란 여자가 당신과 선화 사이를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합니까?”
 
  의뢰자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그럼 당연히 그녀 역시 처리해야죠.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는 한이 있어도 말입니다.”
 
  그 후로 수정이란 아가씨의 미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녀의 뒤를 미행하면서, 그녀의 방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의뢰자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낌새는 찾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선 눈물과 추억, 그리고 슬픔만이 발견되었다. 선화의 집에 들려 일기장을 가져오는 일만 없었다면 그녀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기나긴 인생을 열심히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순진이라는 죄를 가진 친구 덕분에 그녀는 눈물과 추억과 슬픔이라는 벌을 받아야 했고, 급기야는 죽음이란 벌까지 받아야 했던 것이다.
 
  ‘바보 같은 여자야. 친구의 죽음을 금방 잊었다면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녀를 죽이고 난 뒤에도 조금의 아쉬움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의뢰자에게 받은 거액의 돈에 의해 쉽사리 지워졌다. 살인에 대한 죄책감은 없다. 이런 일을 계속 하려면 그따위 죄책감 같은 감상에 빠져선 안되기 때문이다.
 
  의뢰자에 대해서도 잠깐 생각해 보았다. 의뢰자에 대한 의무는 지킬 만큼 다 지켰다고 자부했다. 적어도 의뢰자가 원하는 일은 다 처리해 주었으니 말이다. 선화의 일기장과 사진은 의뢰자의 손에 넘겼으니 알아서 처리했을 것이다.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부인의 재산을 탕진하며 허송세월을 보낼 게 틀림없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여직원을 유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 의뢰자가 어떤 일을 할 지, 어떤 일을 당할 지 알 바 아니다.
 
  한달 기간을 앞뒤로 같은 회사 직원 - 그것도 절친한 사이인 두 명이 사고로 죽었다면 경찰은 우연이라 생각지 않을 것이다. 아마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할 지도 모르고, 회사 안에 떠도는 소문을 근거로 의뢰자에게 까지 수사의 손길이 뻗칠지도 모른다. 물증이 없으니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의뢰자는 의심만 받을 뿐 구속되진 않을 것이다. 물론 부인의 따가운 눈초리는 받겠지만.
 
  갑자기 자살이란 단어가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의뢰자에게 자살에 대한 걸 이야기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의뢰자의 콩맹맹이 목소리가 듣기 싫었기 때문이라면 답이 될까? 소심하고 계산적인 의뢰자가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수정이란 아가씨를 자살로 꾸몄다면 경찰은 수상하게 생각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절친한 친구가 사고로 죽자 이를 슬퍼한 나머지 자살을 했다 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의뢰자는 그의 의견을 계속 무시했으니 어쩌면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도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그런 부류였다. 그는 그런 부류의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의뢰자와는 얼굴대면을 한 적이 없다. 항상 전화로만 연락을 취했으니 의뢰자가 취조를 받는다 해도 문제될 건 없다. 자신이 개입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대만에서 어여쁜 아가씨들과 지내면 되는 것이다.
 
  그는 대만에서의 풍족한 생활을 떠올리며 여유롭게 거리를 활보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거닐던 그는 문뜩 자신이 익숙한 거리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자주 가던 행복 카페로 가는 거리였다. 아마도 한 달이 넘도록 미행하던 버릇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카페에서 마지막으로 마티니나 마셔보자는 생각으로 카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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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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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주시했다.
  갈색 양복을 입은 평범한 얼굴의 남자였다. 나이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인다. 익숙한 그 얼굴에 그녀의 가슴이 콩콩 뜀과 동시에 배언저리도 콕콕 쑤시기 시작했다.
 
  그는 카페 안 위치를 잘 알고 있는 듯 망설임 없이 구석의 테이블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언제나 그가 앉던 그 자리였다.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행동 역시 무행동이였다. 초조한 듯 시계를 보는 행동도 안 했고, 담배를 물지도 않았다. 그저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보통 때와는 달리 그의 손에는 신문이 들려져 있지 않았다. 특이한 현상이었다. 항상 그를 생각할 때면 같이 연상되던 하나가 오늘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 변화가 거의 없는 행동, 갈색의 양복, 마티니, 손수건, 신문. 그 중에 신문이 빠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그의 모습이 새롭게 느껴졌다.
 
  그가 시킨 마티니가 앞에 놓여질 때도 그의 생각하는 듯한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남자는 마티니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수정은 그런 그의 모습을 턱을 괸 채로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는 힐끔힐끔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당당하게 그를 쳐다보며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음미했다. 배의 통증이 조금씩 커져 갔지만 충분히 참을 만 했다. 강도에게 당했던 상처가 왜 아파 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가 마시던 잔이 어느덧 비었다.
  ‘이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잔을 닦겠지.’
  남자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잔을 닦았다.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유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그의 얼굴을 다시 본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남자가 카페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수정은 남자의 뜻밖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계속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설마 나를 찾는 것은 아닐까? 내가 늘 앉아 있던 이 자리에 내 모습이 안 보여서 그러는 것일까? 하지만, 들어오자마자 이 자리에 눈길을 주지는 않았어.’
 
  작은 실망감이 들었다가 사라졌다. 배언저리의 통증이 더욱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수정은 손을 배에 얹었지만, 상처는 역시 없었다. 상처 없는 통증이기에 고통이 더 심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남자가 벌떡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마치 무언가에 놀란 아이의 모습 같았다.
 
  ‘내가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가려는 것일까? 아냐, 그건 아닐 거야. 그럼 왜 갑자기 일어난 거지? 아, 저 남자의 생각을 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그가 나에게 눈길을 한 번 만이라도 주었으면 좋겠어.’
 
  계산대에 서 있던 그가 갑자기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한 번 그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녀의 가슴이 세차게 쿵쾅거렸다. 그가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눈길을 준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그게 고마웠다. 이번만큼은 그에게 무슨 말이건 건네고 싶었다. 순간 배언저리에 파고들던 고통이 커졌다. 마치 예리한 칼이 그녀의 내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이 고통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고개를 떨구었고, 지친 모습으로 카페를 나갔다. 그와 함께 배언저리의 고통도 수그러들었다. 고통이 사라진 자리에는 허무함이 채워졌다.
 
  이제 두 번 다시 그를 볼 수 없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방금 전 그의 모습이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두렵기까지 했다. 수정은 망설였다. 그의 뒤를 따라갈까 말까 갈등했다. 아직까지 카페 밖에서 그의 얼굴을 본 적은 없다. 밖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어떠할까?
 
  수정은 그의 뒤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자신이 영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와 같이 있다한들 그와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 곳에서 혼자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해도 상관없다. 그냥 그의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다.
 
  수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사라졌던 통증이 다시 밀려왔다. 지금 바로 앞에서 누군가가 칼로 그녀의 배를 후비는 듯했다. 엄청난 고통에 그녀는 걸음을 옮길 수조차 없었다. 살갗을 후비고 들어온 예리한 칼날이 그녀의 내장을 툭툭 건드리며 고통을 주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덥석 주저 안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다시 들었을 때 그녀는 혼자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다. 지금 카페를 나간다 해도 그를 찾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마 지금쯤 그는 멀리 가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배를 만져본다. 통증은 없다. 기운이 하나도 없다. 허전함이 밀려 들어왔다. 무언가 가득 찼던 것이 갑자기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선화가 곁에 없다는 현실을 느꼈을 때처럼 가슴이 허전했다.
 
  ‘이제는 무엇을 하지?’
  그렇게 기다렸던, 그렇게 보고 싶었던 그의 얼굴을 보고 난 지금 그녀의 가슴은 공허함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그가 나타날까?’
  그녀는 고개를 내 저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느낌으로 알아 버린 것이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슬픔이 밀려왔다. 이제 그녀 곁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선화도, 그 남자도 이제는 없다. 영혼이 되어 버린 그녀에게 말을 건네줄 사람은 이제 없는 것이다. 누구하나 그녀에게 말을 건네지도,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을 것이다. 슬픔은 눈물을 만들어 내었다.
 
  카페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방금 들어온 이를 바라본다. 익숙한 얼굴이다. 훤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 긴머리와 웃음이 담긴 얼굴, 그리고 장난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눈동자를 지닌 여자였다.
 
  그녀는 수정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수정의 놀라워하는 얼굴을 재미있게 바라보며 그녀가 웃고 있었다. 수정은 입을 열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정의 앞에 선 그녀가 손을 내밀어 눈물을 닦아주었다.
  “기집애. 청승맞게 왜 울어? 바보 같잖아.”
  “선...선화야!”
  말이 트임과 함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수정은 선화를 와락 끌어안았다. 무엇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저 눈물만이 쉴새 없이 흘러 나왔다. 선화도 수정을 부드럽게 안았다.
 
  “됐어. 아무 말 하지마.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아. 이렇게 널 다시 만나게 될 줄 정말 몰랐어. 너도 영혼이 되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어. 그래서 널 찾아 다녔지만 없더라.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카페에 와 본 거야. 근데 여기에 정말 네가 있을 줄은 몰랐어. 정말 반가워. 나 눈물이 날 거 같애.”
 
  “나도······.”
  둘은 오랫동안 포옹을 했다. 이제는 외롭지 않을 것 같다. 이제는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동안의 쓸쓸함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채워지는 것 같다. 수정의 입가에는 어느덧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우리 그 동안 못했던 말이나 실컷 하자.”
  “응.”
  수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이는 눈으로 친구를 바라본다. 선화도 환한 웃음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둘은 밀레의 그림이 걸린 테이블에 앉아 그 동안의 이야기를 시간가는 줄 모르게 했다. 선화는 그녀가 좋아했던 남자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비록 그가 마지막에 안 좋은 말을 했지만, 그 동안 사랑했던 감정만은 소중하다고 말했다. 좋은 추억의 감정이었다고 그녀는 웃으며 말해 주었다. 수정 역시 이 카페에서 알게 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름도 모르고, 사는 곳도 모르고,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고, 눈빛 몇 번 마주친 것이 고작이었던 그 남자에 대한 소중한 감정을 이야기했다. 그 둘은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했다.
 
  손님들이 하나 둘 가버리고, 카페의 문이 닫히고, 모든 불빛이 사라졌어도 둘은 그 자리에 마주 앉아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손을 붙잡고, 서로의 글썽이는 눈동자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한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행복함 그 자체였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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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11월 6일 원고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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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마치고 나서]
 
  드디어 ‘영혼 카페’를 마쳤다. 다른 글들에 비해 유달리 시원섭섭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2년 동안 소설을 쓰지 않다가 다시 써보기로 결심하고 손을 댄 소설이기 때문인 것 같다.
 
  2년 전 김수정(모카커피)양에게 주인공으로 글을 써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도입 부분을 썼었다. 그러다가 스토리가 막혀 썩히고 있다가 1년이 지나 김성희(늑대낭자)양의 도움으로 스토리를 구체화 할 수 있었고, 다시 1년 후인 지금 ‘영혼 카페’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2년 동안 소설을 쓰지 않은 사이에 나의 글 솜씨가 줄었는지 아니면 늘었는지에 대한 평가 때문에 이렇게 가슴이 설레는 것 같다.
 
  지금까지 썼던 ‘행카 시리즈’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혼 카페’에서도 행복 카페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애를 썼고, 영혼이란 존재까지 등장시켜 보았다.
 
  영혼이 과연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형태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육체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사랑마저 잃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들도 사랑이란 감정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영혼이란 존재를 글에 넣어 보았다.
 
  요즘은 사랑이란 단어가 많이 퇴색했다.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만 있는 건 분명 아닐 것이다. 사랑은 사랑이다. 그것이 가장 사랑다운 사랑의 정의가 아닐까? 그러기에 사랑의 감정은 소중하다. 비록 그것이 자신만의 착각에서 오는 것일지라도 그 감정만큼은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마지막으로 김수정 양에게 약속한 소설을 늦게 써주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김성희 양에게 스토리에 도움을 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1997년 11월 6일 지마 정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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