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2 어느 날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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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2 어느 날 갑자기

  Act.2 어느 날 갑자기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교회하고는 거리가 먼 영호마저도 들뜬 기분에 사무실 책상에 마냥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이미 결혼이라는 쇠사슬에 엮여있는 기혼 동료들은 부인 또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을 하며 책상에 앉아있었고, 결혼을 하지 않은 총각 동료들은 애인과 함께 어디로 갈까하는 행복한 고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예뻐 보이는 미스 정 또한 주말과 연이어 붙어있는 크리스마스 밤을 어떻게 하면 스릴 있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지, 영호가 2시간 전부터 타이핑을 부탁한 서류에는 다섯줄만이 타이핑되어 있었다.
 
  “정미라 씨, 아까 부탁한 서류 다 됐나요?”
  영호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미스 정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영호를 따갑게 쳐다보았다. 자신의 상상을 방해한 ‘개뼈다귀’로 향하는 눈초리에 영호는 흠칫하고 말았다.
 
  “알았어요. 조금 기다려요. 금방 해드릴게요.”
  영호는 ‘그 서류 1시간 후에 과장님에게 보고해야 되는 서류인데요.’라는 말을 하려다가, 미스 정의 눈초리보다는 과장의 잔소리가 더 낫겠다싶어 제자리로 돌아와 죄 없는 볼펜만 딱딱거렸다.
 
  모두들 들떠 있는 가운데 영호는 유쾌한 기분을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사귀어 줘요.”
  영호는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악몽이 떠오른 것이다.
 
  살짝 눈을 떠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는 미스 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스 정은 아직도 타자기 앞에만 앉아 있을 뿐 시선은 천장에 가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저 여잔?’
  시선을 의식했는지 미스 정이 천장에서 영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는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아닌 “개뼈다귀”를 쳐다보는 동정의 눈길로.
 
  영호는 그 눈길과 마주치기 싫어 얼굴을 획 돌려버렸다. 입가가 위로 올려지며 비웃는 미스 정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사귀어 줘요.”
  ‘젠장.’
  “처음 볼 때부터 좋아했어요. 사귀어 줘요.”
  ‘빌어먹을. 내가 왜 그랬지?’
  “처음 볼 때부터 정미라 씨 당신을 좋아했어요. 사귀어 줘요. 진심입니다.”
 
  ‘내가 너무 멍청했어. 저 여잔 날 좋아하지 않는데.’
  영호는 작은 출판사의 신입사원이었다. 광고부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사무실로 첫발을 들여놓은 것이 두 달 전 일이었다.
 
  같은 사무실에는 영호를 포함하여 5명의 남자 사원과 2명의 여자 사원이 있는데, 그 중 하필이면 사납기로 소문난 미스 정에게 그 작은 쪽지를 건네 준 것이 크나큰 충격의 원인이 될 줄이야.
 
  미스 정은 생긴 모습이 영호의 첫사랑과 너무나 흡사했다. 물론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끌리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신입사원 축하 쫑 파티 때에도, 가끔 직원들끼리의 회식 때에도 미스 정은 영호에게 조금의 흥미가 있음을 알리는 말투를 하곤 했었다.
 
  신입사원이라는 신선한 존재에 대해 갖는 얇은 호기심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영호는 이틀 전에 그만 그 쪽지를 건네주고 만 것이었다.
 
  “처음 볼 때부터 정미라 씨 당신을 좋아했어요. 사귀어 줘요. 진심입니다.”
 
  물론 이름은 쓰지 않았다. 직접 전해 준 것도 역시 아니다. 점심 시간이 되어 모두 나갔을 때, 서류 정리를 해야한다는 핑계를 대고 일부러 꼼지락거리다가 모두 나가버리자 미스 정의 책상 안에 살짝 넣어 둔 것이다.
 
  미스 정이 그 쪽지를 보고 피식 웃을 때, 영호는 그녀에게 타이핑을 부탁하며 살짝 웃을 계획이었다. 그러면 그녀는 영호가 쪽지를 보냈을 것이라 생각하겠지. 그리고 퇴근 때 저녁을 사겠다고 하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상일이 그렇듯 그녀 역시 영호의 계획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건 신의 장난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 사무실로 들어온 미스 정은 서랍을 열다가 이상한 쪽지를 발견하였다. 여기까지는 영호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찢어질 듯한­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웃곤 했다­웃음소리로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는, 쪽지를 치켜들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처음 볼 때부터 정미라 씨 당신을 좋아했어요. 사귀어 줘요. 진심입니다.”
 
  “오호~ 미라 씨를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나 보네?”
  “미라 씨는 좋겠네. 짝사랑하는 사람이 다 있고. 하하하.”
  사무실 직원들이 한마디씩 했고, 영호는 그 소리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더욱 커다란 비수는 미스 정의 다음 말이었다.
 
  “피식. 누가 이 따위 유치한 쪽지를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난 관심 없어요. 정말 ‘개뼈다귀’ 같은 편지야. 호호호.”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영호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면 바로 눈앞에 미스 정이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고작 이틀 밖에 지나지 않은­생각하기도 사건이었다.
  “어이, 이번 크리스마스 때 뭐할 거야?”
  갑자기 옆의 동료가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야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기 전에 맞은편의 미스 정을 살짝 보니 그녀는 다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이번 크리스마스 때 특별한 계획이 있냐고?”
  “글쎄요. 특별하게 세운 계획은 없습니다. 그냥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보내려고요. 문 선배는요?”
 
  광고부에서 그래도 가장 가깝게 지낸다고 할 수 있는 문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나야 계획이랄 게 있나. 떡두꺼비같은 아들래미와 떡 같은 마누라랑 보내야지. 매년 이맘때면 가슴속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는데 뭔지 아나? 결혼은 왜 했니? 이거야. 선녀 같던 마누라가 떡녀로 변하는 건 시간 문제라고. 하하하.”
 
  “형수님이 들으시면 섭섭해하실 텐데.”
  “괜찮아, 괜찮아. 사실인데, 뭘. 내 마누라는 떡녀고, 나는 떡돌이라네. 우린 매일 밤마다 떡을 만들지. 떡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자넨 모를 거야. 하하하.”
 
  그 소리에 동료 직원들이 웃음을 제겼다.
  영호도 어쩔 수 없이 웃고 말았다.
  유난히 날카로운 미스 정의 웃음소리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 영호는 왠지 가슴이 아파 왔다.
 
  사무실 가득 울리기 시작한 웃음소리를 순식간에 멈추게 한 건 곽 과장의 출현이었다. 동료들은 일순간 무서운 사자를 만난 쥐새끼처럼 입을 봉하고, 일에 몰두하는 척했다. 문 선배도, 영호도, 미스 정도.
 
  “이거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연말이라고 해서 너무 들떠 있는 거 아냐? 이번에 출간된 ‘유혹 12월호’가 판매 부진인 거 모두 알고 있지? 창고에 재고가 이 만큼이나 쌓여있단 말이다. 이 화살이 우리 부서로 돌려질건 뻔한 일인데 지금 웃음이 나오나? 어? 이런 한심한 친구들 같으니라고.”
 
  과장의 지긋지긋한 잔소리도 영호에겐 이제 면역이 되어 있었다. 늘 사자 같다는 곽 과장에 대한 인상이 지금도 여김 없이 늙은 사자의 형상으로 영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문영호 씨? 해 오라는 서류는 다 했습니까?”
  영호는 속으로 ‘이크’했다. 서류는 여태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가 과장의 출현과 동시에 타자기로 시선이 가있는 미스 정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어, 서류는 아직...”
  ‘미스 정에게 2시간 전부터 해달라고 했는데, 천장만 바라보고 있어서.’ 라는 말을 하려했지만,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허, 문영호 씨! 내가 몇 시간 전부터 급한 서류니까 빨리 해 오라고 말했죠? 그런데 아직도 안 했습니까?”
 
  “네.”
  방금 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으로 들떠있던 사무실이 금방이라도 화산이 터질 듯한 폭풍전야의 분위기로 바뀌어 버렸다. 사람들 모두 긴장했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지금 책이 팔리지 않아 내일이라도 당장 문을 닫을지 모르는 판국에 크리스마스 연휴다 연말이다 해서 들떠 가지고 시키는 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월급이 공짜로 땅에서 솟아나나 하늘에서 떨어지나, 어? 문영호씨! 그 서류 오늘까지 해 놓지 않으면 퇴근할 생각하지도 말아요? 알겠어요?”
 
  “네.”
  늙은 사자가 사무실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버리자 살벌한 분위기도 함께 사라졌다. 문 선배가 언제나처럼 한마디 중얼거렸다.
 
  “그 나이 되도록 아직 과장에 머물러 있는 당신이나 일 좀 열심히 해서 승진하슈. 그래야 우리들이 마음놓고 일을 하지. 지는 이번 연휴에 마누라 몰래 예쁜 여자 옆에 차고 밀월여행 갈 계획이나 세우면서.”
 
  영호는 맞은편 벽에 걸려있는 벽걸이 시계를 보고는 퇴근 시간이 앞으로 30분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고개를 조금 내려 미스 정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미스 정의 시선은 다시 천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쪽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쪽지를 보냈다고 생각할까? 나에게 정말 관심이 없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로 나에게 말을 건 적이 없었던 거 같아.’
 
  여러 가지 다양한 생각들이 영호의 머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무엇 하나 확신이 없는 추측과 상상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퇴근시간이 1분 남았고, 다들 퇴근 준비로 들떠 있을 때, 다시 늙은 사자 곽 과장이 들어와 퇴근 분위기를 억누르고 말았다.
 
  “자, 내일부터 성탄절 연휴이니까 하던 일들 마무리하고 퇴근들 해요. 연휴동안에 밀렸던 스트레스 해소시켜 버리고 화요일 날 봅시다.”
 
  영호를 비롯해 문 선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말을 빙자하여 노닥거리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으니 철야 근무하라는 명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그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선배가 영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영호가 문 선배를 쳐다보자 그는 한 손을 입에 갔다 대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위로 치켜드는 것이었다. 영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 정으로 인한 아픈 가슴을 술로 푸는 것도 괜찮을 듯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곽 과정은 그가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데, 문영호씨?”
  “네?”
  “아까 해오라던 서류는 다 끝냈습니까?”
  동료들이 퇴근을 하기 위해 책상 정리하는 소리가 귀속으로 살그머니 들어오고 있었다.
 
  미스 정의 타자기로 눈을 돌려보니 서류는 아직도 타자기 속에 파묻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 아직.”
  “그 서류 다 해놓고 가기 전엔 퇴근할 생각하지 말아요. 연휴 끝나고 처리하기에는 너무 늦는 서류니까 오늘 다 해놓아야 합니다. 아셨죠?”
 
  “네.”
  곽 과장이 나감과 동시에 영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미스 정에게 맡겨 놓은 서류의 타이핑이 끝나야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자료를 뽑고, 다시 타이핑을 쳐야 하는데, 그의 타이핑 실력은 굼벵이가 남산고지를 향해 기어가는 정도였으니 걱정이 안될 수가 없었다.
 
  ‘일이 순조롭게 된다고 해도 새벽에나 끝날텐데. 빌어먹을.’
  “오늘 자네랑 술 마시는 것은 보류해야겠는걸. 쩝.”
  문 선배의 아쉬워하는 소리와 동료들의 안쓰럽다는 눈길에 영호는 패배자의 쓴맛을 느끼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먼저 갈게요, 영호 씨.”
  “수고하게. 눈치봐서 그냥 도망쳐.”
  “같이 술이라도 하려했더니. 그 놈의 곽 부장.”
  모두 그를 위로하며 밖으로 나갔다. 원수처럼 느껴지던 미스 정은 한마디 말도 없이 획 나가버렸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영호의 가슴을 더욱 슬프게 했다.
 
  ‘되는 일이 없군.’
  동료들이 나가버린 사무실 안은 히터가 켜져 있음에도 쌀쌀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아직도 미스 정의 체온이 남아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작에 타이핑이라도 배워 둘 것을.”
  그가 끙끙거리며 타자기에 손을 얹고 두어 자 퉁겼을 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영호는 그녀가 미스 한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왜 돌아왔을까 의문을 가졌다.
 
  “뭐, 놓고 갔어요?”
  “아니에요. 다른 분들에게는 깜박하고 가져오지 않은 물건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놓고 간 거 없어요.”
 
  미스 한은 남자들이 많은 사무실 안에서도 그렇게 눈에 띄는 아가씨가 아니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곳에 들어와 일만 하는 베테랑급 여자였지만, 얼굴이 특출 나지도, 말솜씨가 뛰어나지도 않아 바로 옆에 있는지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여자였다. 영호 역시 가끔은 그녀가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서류 타이핑 할 거 많죠?”
  “조금요.”
  “제가 대신 쳐 드릴게요. 영호 씨 타이핑 실력 아니까 도와주려고 일부러 되돌아 온 거예요. 저희들끼리만 일찍 퇴근하기도 미안하잖아요. 좋은 크리스마스 연휴인데 일찍 들어 가셔야죠.”
 
  “은숙 씨는 데이트 안 해요?”
  “후후, 데이트할 사람도 없는 걸요. 자, 서류나 주세요. 빨리 치고 가야죠.”
 
  영호는 미스 한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리에 그녀가 앉더니 서류를 한번 훑어보고는 타자에 들어갔다. 그로서는 부러운 타이핑 솜씨로 서류는 금방 완성이 되었다.
 
  “타이핑할 것이 또 있나요?”
  “몇 장 더 있는데, 그건 제가 이것을 토대로 만들어야 돼요. 괜찮다면 조금 기다려 주시겠어요. 30분 정도.”
 
  “그럴 게요.”
  미스 한이 고마웠다. 평소에는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관심 밖의 여자였는데, 지금 따라 존재의 의미를 더욱 절실히 느끼는 것은 왜일까? 미스 정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더욱 착잡해졌다.
 
  “커피 하실래요? 제가 뽑아 올게요.”
  영호가 대답도 하기 전에 미스 한은 사무실을 나가고 말았다.
  서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지 깔끔하게 보여지기 위해 타이핑을 해야한다는 약점이 있기는 했지만 미스 한이 도와준다면 1시간 안에 끝날 수 있을 듯 싶었다.
 
  ‘저녁이라도 사줘야겠네.’
  미스 한이 자판기 커피 두 잔을 손에 들고 들어왔다.
  “고마워요. 오늘 신세를 많이 지네요.”
  “별 말씀을요. 서류는 아직 멀었나요? 된 거 있으면 그것부터 주세요. 치고 있을 게요.”
 
  “그러는 게 좋겠네요. 자, 여기요.”
  미스 한도 그렇고 영호도 그렇고 말이 적은 사람들이라 일하는 동안에는 말을 주고받지 않았지만, 영호는 기분이 좋았다. 혼자 사무실에 앉아, 되지도 않는 타이핑을 새벽까지 치고 있을 거라 예상했던 크리스마스 연휴의 시작을 빨리 끝마칠 수 있다는 생각이 더욱 그런 기분을 만든 듯했다.
 
  “영호 씨는 애인 없어요?”
  갑자기 물어봤기 때문에 영호는 당황했다.
  “아, 아뇨. 갑자기 그건 왜?”
  “그냥요. 왜요? 놀라셨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갑자기 물어 보기에...”
  “영호 씬 순진한 거 같아요.”
  영호는 할 말을 잃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미스 한이 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은 많이 들었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하지만 순진하다고는 생각 안 해요.”
 
  “미라 씨에게 쪽지 보낸 건 영호 씨죠?”
  영호는 뜨끔했다. 역시 모두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호가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있자 미스 한이 말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하지만 영호 씨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요.”
 
  “무슨?”
  “미라 씨는­이런 말, 하는 건 안 좋은 거지만­영호 씨하고는 안 어울리는 여자예요. 영호 씨는 순진하고 착하지만 그 여자는 그렇지가 않거든요.”
 
  미스 한이 갑자기 내뱉은 말은 충격이었다. 설마 저 여자가 질투를 하고 있는 건 아닐텐데.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미라 씨는 스캔들이 많아요. 그건 여기에서 1년 이상 일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어요. 곽 과장님이랑 이상한 사이라는 것도요. 영호 씨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알려드리는 거예요.”
 
  “곽 과장님과 미라 씨가? 하지만 곽 과장님은 이미 결혼한 사람인데.”
 
  “그러니까 스캔들이죠. 그러니 영호 씨도 미라 씨에게 너무 집착하지 말아요.”
 
  영호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영호 씨가 상처 받을까봐 미리 이야기해 드리는 거예요.”
  아찔한 순간이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스 정이 아직까지 혼자일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 그 상대가 늙은 사자인 곽 과장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기에 충격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스 한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기엔 너무 진지한 표정이었다.
 
  영호가 미처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영호가 받았다.
  “아직도 일하고 있는 거야?”
  문 선배였다.
  “대충하고 나오라고. 그 놈의 곽 과장 말에 휘말려서 즐거운 밤에 일하고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 크리스마스 끝나고 아침 일찍 미스 정이나 미스 한에게 부탁해서 해놓으면 되는 거니까 지금 나오라고.”
 
  “하지만...”
  “아무튼 빨리 나오게. 혼자 술 마시는 게 얼마나 재미없는 일인지 알지? 지금 여기 ‘OB 호프’니까 올 때까지 기다리겠네.”
 
  전화는 끊어졌다. 영호는 왠지 맥이 빠졌다. 빨리 일 끝내고 문 선배랑 술이라도 마셔야 이 충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그런 말을 해준 미스 한이 미웠다.
 
  “영호 씨에겐 충격적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될 수 있는 한 잊어 버려요. 그게 영호 씨에게 좋아요.”
 
  사랑이란 감정을 다스리기엔 자신은 너무 역부족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호는 더욱 비참해졌다.
 
  서류 작업은 잠시 뒤에 완료되었고, 영호와 미스 한은 같이 회사를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저녁이라도 사 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아니에요. 다음에 사 주세요. 동생들 저녁 해줘야 하거든요.”
  언젠가 언뜻 미스 한에 대해서 들은 기억이 났다. 미스 한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죽고부터는 그녀가 두 동생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영호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미스 한을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도 주고, 문 선배가 혼자 술 마시고 있을 ‘OB 호프’로 가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문 선배는 종업원 아가씨와 같이 정겨이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영호가 나타나자 문 선배는 아쉬워하며 여 종업원을 일어나게 하고 대신 영호를 그 자리에 앉게 했다.
 
  “역시 문 선배님은 천하의 바람둥이네요.”
  “훗, 남자라면 이 정도의 능력은 있어야지. 저런 건들건들한 애들은 웃기는 얘기와 돈이면 끔뻑 넘어간다고. 비법이라면 그게 비법이지.”
 
  여자를 꼬시는 비법. 우스운 이야기와 돈. 미스 정에게도 저런 것이 통할까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그 의문도 잠깐, 문 선배가 권하는 술잔에 쓴 맥주를 받아 단숨에 마셔버렸다.
 
  “여자 때문에 괴롭지? 하하하. 안다고, 다 알지.”
  늦은 시간까지 마시고 비틀거리는 문 선배를 부축하며 영호는 문 선배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세요?”
  “치~ 내 주량은 내가 알아. 난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고. 빌어먹을 곽 과장 때문에 좀 마셨기로 서니 내가 취할까 보냐. 하하하.”
 
  영호는 묵묵히 걸어가기만 했다.
  “자네. 미스 정 좋아하지?”
  뜨끔했다. 미스 한이 찔러놓았던 가슴을 문 선배가 다시 바늘로 찌른 것이다.
 
  “자네 너무 숙맥이야. 훗. 그만한 미모에 그만한 몸매를 가지고 아직도 남자가 없겠어? 게다가 소꿉장난도 아닌데 사랑 쪽지라니. 훗. 지나가던 강아지도 웃겠다, 웃겠어. 미스 정 같은 여자 이 세상에 쌔고 쌨어. 아니 그보다 더 잘난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미스 정인감. 이봐, 영호. 같은 문파로서 내 충고 한마디하지. 더 충격 받기 전에 미스 정에게서 감정 버리게. 자네가 좋아서 해주는 충고니까 달갑게 생각하지 말라고. 그 여잔 창녀야, 창녀.”
 
  미스 한이 했던 말과 같은 뜻이었다. 비록 표현의 방법이 다르긴 했지만.
 
  영호는 할 말을 잃었기에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미스 한으로 인해 받은 충격이 되살아났을 뿐 아무렇지 않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하지만 창녀란 표현은...
 
  “창녀라고 해서 화났나? 화났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우리 출판사 높은 분들 치고 미스 정과 놀아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걸. 내가 아까 말했지? 여자는 우스운 이야기와 돈에 약하다고. 미스 정도 예외는 아냐.”
 
  “술 많이 취하신 것 같네요, 문 선배.”
  “그래, 좀 취한 것 같네. 후후, 자네 마음 내 알지. 총각이라면 그런 시련쯤은 한두 번 겪어보지 않나? 후후. 미스 정일랑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미스 한 어때? 내가 보기에는 차라리 미스 한이 자네에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글쎄요.”
  “하긴 미스 한은 너무 매력이 없는 여자지. 일찍부터 부모를 잃고 두 동생 돌봐주느라고 여자다운 매력을 모두 포기했으니까. 그렇지만 생활력 하나는 강하지. 아무튼 선택 잘하게. 누구를 선택하든 내가 자네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테니까.”
 
  “고마워요, 선배.”
  술김에 내뱉는 문 선배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버리면서도 영호는 내심 가슴이 아파 왔다. 어쩌다가 이런 감정에 휘말리게 된 건지...
 
  “자네 영혼을 믿나?”
  느닷없이 물어보는 문 선배의 질문에 영호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갑자기 영혼이라뇨?”
  “안 믿는 모양이로군. 나도 안 믿네. 만일 영혼이란 것이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며칠 전에 ‘유혹의 선’이란 비디오를 보았는데 참으로 재미있더군. 한 미친놈이 자신을 일부러 죽여서 영혼을 체험했다가 다시 되살아난다는 괴상망측한 내용이었어. 언제 빌려서 보라고. 그 영활 보니까 갑자기 영혼이란 존재를 믿고 싶어지더군. 내가 죽어서 영혼이 된다면 어떤 기분이고 어떤 생활을 할까 하고 말이야. 그리고 천당과 지옥은 있을까 하는 묘한 생각도 들고. 하하하. 술에 취한 사람 쳐다보듯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 자네 종교 있나?”
 
  “아뇨.”
  “종교와 영혼의 관계라는 책을 어디서 본 듯한데. 끄응, 생각이 나지 않는군.”
 
  “그런데 갑자기 웬 영혼입니까?”
  “응? 아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내 여동생 알지? 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눈에 보인다는 말을 자주 했었지. 돌아가신 할머니도 보이고, 다른 영혼들도 보인다고 말이야. 어머닌 그 아이가 신이 들려 무당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중학교 때 안 좋은 일이 있고부터는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지내다시피 해. 아무래도 정신 병원 보내야 할 듯 싶어. 실은 어제 마누라랑 그것 때문에 한바탕 했거든, 젠장.”
 
  “......”
  “끄응. 아무래도 너무 마신 것 같네. 벌써 집인가? 바래다 줘서 고마우이. 잘 자게. 참, 오늘 밤 조심하게나. 저승사자가 나타나서 자네를 데려갈지 모르니까. 가끔 저승사자들이 사람을 잘못 잡아가는 경우도 있다더군. 하하하. 잘 가게.”
 
  영호는 미덥지 않은 문 선배의 말을 되새기며 집으로 향했다.
  “영혼이라고? 훗.”
  영호는 영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어렸을 때 소심한 성격­지금도 그렇지만­이었을 때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잠깐 가져보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종교도 없고, 특별한 생활관도 없는 그로서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꿈의 전부였다.
 
  이렇게 평범한 꿈을 간직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서자마자 섬뜩한 한기를 느낀 것은 비단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불을 켜자 썰렁한 기운이 방안에 가득 배어있었다. 사람이라곤 전혀 없는 삭막한 북극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휴우. 언제나처럼 쓸쓸하군.”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 침대에 벌렁 누워버렸다.
  5평의 원룸 형태의 아파트. 혼자 먹고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역시 쓸쓸했다. 오늘 있었던 일들 때문에 더욱 쓸쓸한 기분이 드는 듯했다. 게다가 방금 마셔버린 알콜의 기운이 머리 속을 파고들자 더욱 우울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미라 씨가 창녀라고? 흥.”
  믿어지지 않는 말들을 너무 많이 들어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그들의 말이 사실이기는 한 것일까? 설마 문 선배가 나와 미스 한을 짝지어 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 미스 정은 정말 곽 과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일까? 투명인간이 될 수만 있다면, 영혼이 될 수 있다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호는 어느덧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밤, 영호는 죽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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