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03. 여자와 오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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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03. 여자와 오뎅

행복 카페 이야기

Happy Cafe Story

이야기 셋

여자와 오뎅

이정세 지음

 
  어둠이 깔리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어깨동무를 한 연인들이 한꺼번에 거리로 밀려들었다. 그들 틈 사이로 말년휴가를 나온 병장 서대우가 우두커니 서서 오뎅가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야시하도록 깊은 밤에 혼자 오뎅을 먹는 여자라...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지나가는 연인들이 그를 뭐 보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대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뎅가게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열심히 쳐다보고 있는 오뎅가게에는 늘씬하고 키 큰 아리따운 아가씨가 혼자 고독을 씹으며 오뎅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대우에게는 연인들의 거리에서 혼자 오뎅을 먹는 저 여자가 그렇게 고상하고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꼬시고 싶다는 충동이 대퇴부를 강력하게 내리치고 있었다. 대우는 더 이상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오뎅가게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 여자의 옆자리에 덥석 주저앉았다.
 
  “아줌마, 여기 오뎅 주세요.”
  오뎅을 시켜 놓고 옆의 여자를 힐끔 쳐다보니 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가! 여자 혼자 오뎅을 먹는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대우는 곰곰이 이 여자를 어떻게 꼬실까 고민에 빠졌다. 아줌마가 오뎅이 담긴 그릇을 그의 앞에 내 놓았지만 먹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오뎅을 먹기 위해 앉은 것이 아니니까.
 
  대우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할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지금 여자와 자신이 있는 곳이 분위기 있는 카페였다면,
  “저 같이 앉아도 될까요?”
  라는 말로 접근할 수 있지만 지금은 여자가 바로 옆에 앉아 있지 않은가? 만일 락카페였다면,
  “같이 춤추실래요?”
  라는 말이면 쉽게 일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뎅가게에서 디스코나 람바다를 출 수는 없지 않은가?
 
  ‘도대체 오뎅가게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여자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거지?’
 
  대우는 고민만 하다가는 안되겠다 싶어 다짜고짜 여자에게 말했다.
 
  “오뎅 맛있어요?”
  여자가 고개를 돌려 대우를 쳐다봤다. ‘이건 뭐 하는 똥개야?’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은 역시 아름다웠다.
 
  “네.”
  여자는 짧게 말하고 고개를 다시 원위치 시켜놓았다. 대우는 다음 말을 찾아보았지만 오뎅가게에서의 헌팅은 처음이라 할 말이 없었다.
 
  대우가 그렇게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에 여자는 마지막 오뎅을 입안에 넣고 있었다. 대우는 시간의 촉박함을 깨달았다. 어느덧 여자의 입에서는 오뎅을 꽂았던 마지막 대가 뼈다귀처럼 나오고 있었다.
 
  대우는 아차 싶어 시간을 더 끈다는 것이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오뎅 꼬지를 하나 잡고 여자에게 쏙 내밀고 말았다.
 
  “하나 더 드실래요?”
  여자가 다시 대우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대우의 얼굴에서 오뎅으로, 오뎅에서 얼굴로 옮겨져 갔다. 똥개를 바라보는 듯한 뜰뜨름한 얼굴이었지만 역시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대우는 생각했다. 여자가 대뜸 물었다.
 
  “왜요?”
  “음... 맛있잖아요.”
  “...고마워요.”
  여자는 대우가 내민 손에서 오뎅을 빼앗다시피 가져가더니 한 입에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무정하게도 오뎅가게를 나가 버리고 말았다. 대우는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앞에는 한 입도 대지 않은 뜨끈한 오뎅이, 어서 먹어달라는 듯이 놓여 있었다. 아무리 배가 부르더라도 공짜라면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치우는 그로서는 아까운 오뎅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주머니 사정이 형편없는 그가 피 같은 돈을 투자해서 시켜놓은 오뎅을 한 입도 대지 않고 그냥 나간다는 것은 오뎅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자냐 오뎅이냐! 그는 결심을 해야 했다.
 
  “아줌마, 여기 얼마예요?”
  “아니, 하나도 먹지 않았잖아요?”
  아줌마가 이상한 눈으로 보건 말건 그는 말년휴가를 저만치 가고 있는 오뎅을 먹는 여자 - 오뎅걸에게 걸기로 결정했다. 대우는 주머니에서 피와 같은 돈을 오뎅값으로 치르고 오뎅가게를 박차듯 나왔다.
 
  그 여자 - 오뎅걸을 쫓아 그는 달려갔다.
  “저기요, 잠깐만요.”
  여자가 세 번째로 그를 쳐다봤다. 역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왜 그러세요?”
  “저기 할말이 있어서 그러는 데요.”
  여자는 짜증나는 투로 말했다.
  “저 아세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할말이 있어서 그래요.”
  대우는 대충 얼버무리면서 무슨 말을 할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결국한다는 말이,
  “혹시 남자 친구 많으세요?”
  였다. 오뎅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많아요!”
  “그럼, 한 명 더 늘린다고 표시가 나지는 않겠네요?”
  피식. 처음으로 여자가 웃었다. 대우는 속으로 야호 소리를 질렀다. 대우는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꺼내었다.
 
  “커피라도 한잔 하실래요?”
  말을 하고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만일 싫다고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설마 오뎅까지 하나 주었는데 거절하지는 않겠지.
 
  여자가 말했다.
  “네. 좋아요.”
  ‘나이스.’
  대우는 가까운 곳에 커피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약간 떨어진 ‘슬기’를 찾았다. 그곳으로 간 이유는 오로지 그곳 커피값이 다른 커피숍보다 싸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조금은 여유 있게 한적한 테이블을 찾아 앉았다. 이제 대우는 더 이상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커피숍까지 순순히 따라왔다는 것은 여자가 자신에게 조금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조그만 관심을 키우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대우는 여자의 이름을 물어본 다음에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서대우라고 해요.”
  “RT세요?”
  자신의 짧은 머리 때문에 그런 질문을 했나보다 생각한 대우는 ROTC라고 대답하려다 뭐 그런 거 가지고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란 생각이 들어 정직하게 말했다.
 
  “군바리예요.”
  그러자 여자의 인상이 금새 변하였다. 대우는 아차 싶었다.
  ‘에고, 이런. 그냥 RT라고 할걸.’
  대우는 똥 보는 듯한 여자의 눈빛을 바꾸어 보려고 서둘러 말했다.
 
  “지금 말년 휴가 중이에요.”
  그는 일부러 말년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여자의 표정은 아까 그대로였다.
 
  대우는 그의 특징인 푼수 같은 행동과 말로 여자의 표정을 바꿈과 동시에 환심을 사려 애섰다. 군대 졸따귀로부터 들은 우스운 이야기로부터 해서 자신이 직접 개발한 자칭 슈퍼 유머로 온갖 재롱을 다 떨었고, 보람이 있었는지 여자는 피식 웃음을 보여주었다.
 
  어느 덧 한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대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를 혼자 다 떠들었고, 여자는 피식 웃기만 할 뿐, 자신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대우는 자신이 실패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했을 텐데 자신의 이름만 이야기했을 뿐, 사는 곳, 직장에 대해서는 전혀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도 대우의 재롱에 서서히 실증이 났는지 손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대우는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요, 지금 친구들이 모두 직장이나 군대에 있어서 내일 당장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거든요. 전화번호 적어드릴 테니까 내일 연락 주세요. 혹시 알아요. 술이라도 한잔 사줄지.”
 
  그렇게 말을 하고, 수첩을 꺼내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대우가 별명을 붙여버린 여자 - 오뎅걸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받아 쳐다보지도 않고, 안쪽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대우는 실망했다.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고, 애꿎은 커피값과 오뎅값만 날아갔다는 생각이 들어 슬퍼지기까지 했다.
 
  오뎅걸과 헤어져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의 발걸음은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모처럼 휴가를 나와 괜찮은 여자를 만났다 싶었는데 여자는 자신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냥 오뎅이나 먹을 걸.”
  대우는 무엇보다 한 점도 먹지 못한 오뎅이 아까울 뿐이었다.
  ‘지금 당장 그 오뎅가게로 달려가 아까 그 오뎅을 도로 달라고 하면 아줌마는 오뎅 국물을 내 얼굴에다 끼얹겠지?’
  대우는 툴툴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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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튿날, 대우는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눈을 뜰 수가 있었다. 새벽 내내 컴퓨터 통신 하이텔에 접속하여, 채팅실에 머물면서 말년휴가를 뜻깊게 같이 보낼 여자를 물색하다가 새벽 5시가 넘어서야 포기하고, 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잠을 깬 것도 그의 방에 놓여있는 훌륭한 80년대식 고물 전화기의 벨소리 때문이었다. 옛날에 폐기처분 했어야 할 기계식 전화기에서 벨이 요란하게 울리자 그는 잠을 방해받은 것에 대한 짜증을 토해내며 마지못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막 잠에서 깬 그의 목소리는 다 죽어 가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물론 그 목소리에는 잠을 깨게 한 상대방에 대한 짜증이 담겨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상대방이 뭐라고 했다.
  대우는 순식간에 덜 깬 잠이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두 손으로 잡았다. 전화벨을 울리게 한 장본인이 바로 어제 꼬시려다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오뎅걸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래서요? 아, 네. 그래요, 그럼. 7시에 그곳에서 봐요.”
  전화를 끊자마자 대우는 환호성을 질렀다.
  “끼야호! 드디어 미끼를 물었구나. 이제 뜻깊은 말년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오호, 신이여!”
 
  대우는 약속시간이 아직도 5시간이나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긴장이 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머리에 무스를 발라 보기도 하고, 이 옷을 입을까, 저 옷을 입을까 주접을 떨기도 했다.
 
  “오늘은 잘 보여야지.”
  그리고, 방바닥에 가만히 앉아 계획을 세웠다.
  ‘여자가 한번밖에 만나지 않은 남자에게 술을 사달라고 전화를 한 것은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증거겠지. 그럼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키스까지는 해야 돼. 자, 대우야 너의 좋은 머리로 계획을 세워 보자, 계획을.’
 
  대우는 약속 시간 30분전까지 연습장에 써가며 계획을 착실하게 세워나갔고, 10분 동안 연습장에 정리된 계획을 머리 속으로 암기했다.
 
  ‘오뎅걸이 이런 말을 하면 이렇게 대답을 하고, 저런 말을 하면 이렇게 대답을 해야지. 그리고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다시 되돌아와 여자의 옆에 앉아서 손금을 봐준다는 명목으로 손을 잡아 경계심을 풀어놓는다. 그 뒤에 이 멋있는 용안에 박힌 눈동자의 힘을 풀어 게슴츠레 오뎅걸을 쳐다보면, 오뎅걸은 뽕 가겠지. 그 뒤에 살며시 키스를 하면... 흠~ 역시 난 머리가 너무 좋은 거 같아. 완벽해!’
 
  대우는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랬다. 벌써 약속 시간 15분 전 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둘러 멋있다고 생각되는 옷을 골라 입고, 머리에 힘을 준 다음에 약속장소인 ‘OB본 호프’로 향했다.
 
  오뎅걸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우는 어제보다도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오뎅걸의 얼굴을 주시하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요, 방금 왔어요.”
  대우는 오뎅걸의 옆자리에 앉으려하다가 처음부터 너무 접근을 하면 경계를 할 것 같아 맞은편 자리에 엉덩이를 깔았다.
 
  “미안해요. 술 사달라고 전화해서. 부담스러우실 텐데.”
  “아뇨. 괜찮아요. 그러잖아도 심심했던 참이었는 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빈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어머니에게 손을 벌린 아까의 일이 생각나 눈물을 찔끔 흘렀다.
 
  “너는 어떻게 된 녀석이 휴가 왔으면 집에 있으면서 집안 일이나 도울 것이지, 맨 날 발발거리며 쏘다니냐? 그리고, 휴가 나오던 날 용돈 하라고 10만원 준건 다 어째고 다시 손을 벌리는 거야?”
 
  “친구들 만나서 술 마셨는데 다들 돈이 없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다 썼어요.”
 
  “이그 잘한다, 잘해. 자, 2만원이니까 휴가 끝날 때까지 써.”
  “만원만 더 주시면 안돼요?”
  “이 녀석이...”
  대우는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오늘 오뎅걸과 반드시 사고를 치겠다는 굳은 다짐을 했다. 만일 실패하는 날이며 4일이나 남은 휴가 기간을 혼자 쓸쓸하게 보내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겨우 타 낸 3만원의 용돈 역시 훨훨 날아가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대우는 어제처럼 있는 얘기 없는 얘기 - 어제 하이텔 유우머란에 올라왔던 글 중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어 여자에게 집중 폭격했다.
 
  대우는 거의 필사적이었다. 남은 휴가를 혼자 보낼 것이냐, 여자와 같이 보낼 것이냐의, 생사의 갈림길에 선 것처럼 떠들어대는 대우는 자신이 생각해도 미쳤다 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겨우 어머니에게 사정하다시피 해서 탄 3만원과 어제의 커피값, 그리고 한 점 먹지도 못했던 오뎅이 아까워서라도 그는 오뎅걸의 입술을 훔치기로 작정을 했다.
 
  어제와는 달리 맥주가 뱃속으로 들어가 기분을 좋게 만들어서인지 오뎅걸은 시도 때도 없이 웃었다. 심지어는 대우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기 위해 담배를 피우다가 연기가 눈으로 들어가 눈물을 찔끔거리는 모습에도 깔깔거리며 미친년처럼 웃는 것이었다.
 
  대우는 1차 계획이 성공했음을 알아차리고, 장소를 바꾸자고 했다. 좀더 앉아서 맥주를 들이키고는 싶었지만, 오뎅걸의 술발이 그의 10배는 됨직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있다가는 술값을 감당하지 못하고 옷을 벗어야 될 처지에 놓이게 될 것 같아서였다.
 
  대우는 이야기를 하느라고 두 잔밖에 마시지 못한 술잔을 슬프게 바라보며 엉덩이를 들었다. 술값이 그의 예상을 뛰어넘어 2만 5천원이 나오자 한숨이 팍 새어나오고 말았다. 다행이 오뎅걸은 먼저 밖으로 나가 있어서 그의 한숨 내쉬는 모습을 보진 못했다.
 
  ‘무슨 여자가 술발이 저렇게 세냐. 피 같은 내 돈.’
  대우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파란 지폐 3장을 내고, 빨간 지폐 1 장을 받았다. 그는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조용한 카페에 가서 콜라를 시키자. 콜라는 끽해야 천5백원이니까, 오뎅걸이 그 비싼 3천원짜리 쉐이크를 시켜도 모두 4천 5백원이면 되지. 휴우, 그래도 5백원은 남는군.’
 
  오뎅걸의 술기운이 떨어지기 전에 다음 계획으로 돌입하기 위해 그는 가장 가까운 ‘쵸이스’로 갔다. 그리고 일부러 커튼이 쳐져 있는 테이블로 들어갔다. 오뎅걸도 그 장소가 싫지는 않은 듯 안으로 들어왔다.
 
  메뉴판을 본 오뎅걸은 예상대로 그 비싼 딸기 쉐이크를 시켰고, 대우는 다시 눈물을 머금고 콜라를 시켜야했다.
 
  오뎅걸의 앞에 연분홍색의 딸기 쉐이크가 놓이자 대우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쉐이크가 먹고 싶지.’
  입맛을 다시는 대우는 앞에 놓인 콜라를 홀짝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금 결심했다. 반드시 오뎅걸의 그 맛있어 보이는 입술을 훔치겠노라고.
 
  대우는 몇 분 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2차 계획에 들어갔다.
  화장실에 간다고 뻥 친 다음 밖으로 나와, 종업원이 이상한 눈으로 보건 말건 카페 안을 서성이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뎅걸의 맞은편 자리가 아닌 바로 옆자리에 살며시 주저앉았다. 오뎅걸이 옆자리에 앉은 것에 대해 뭐라고 해도 그에 대한 답변은 계획 속에 있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싫은 눈초리를 던질 줄 알았던 오뎅걸은 그냥 한번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2차 계획은 어려움 없이 성공! 그럼 이제 3차 계획으로 돌입해 볼까.’
 
  생각과 동시에 대우는 오뎅걸에게 말했다.
  “점 봐 드릴까요?”
  오뎅걸이 뜻밖이라는 듯이 대우를 쳐다봤다.
  “점 볼 줄 아세요?”
  “그럼요. 군대에 있을 때 할 일이 없어서 손금 보는 거 공부했거든요. 손 한번 내밀어 봐요.”
 
  점보는 걸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 대우는 몇 번의 걸 헌팅 경험을 통해 그 진리를 알고 있었던 터였다. 오뎅걸 역시 손금을 봐주겠다는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대우는 천연덕스럽게 오뎅걸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손금을 봐 주는 척했다.
 
  “어렸을 때 잦은 사고가 많았네요. 병을 앓은 적도 있고.”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손금 잘 보시네요.”
  ‘바보. 어렸을 때 잦은 사고 안 당하고, 병 안 앓은 사람이 어디 있어.’
 
  “성격은 내성적인데 외향적으로 바꾸려고 노력 중이군요.”
  “어머. 맞아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지.’
  “손을 이렇게 오므려 봐요. 음, 결혼은 30세 거의 다 되어서 하겠네요. 연애 결혼할 확률이 30퍼센트예요. 그리고 결혼할 상대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남자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남자고요, 40대 들어서면 생애에 있어 커다란 위험이 일어나요. 그게 남편과 이혼하는 것 일수도 있고, 아니면 큰 병을 얻는 것 일수도 있어요. 그리고 생명선을 보니까 40세에 겪는 위기를 넘기면 70세까지는 별탈 없이 살겠네요.”
 
  “어떻게 그렇게 손금을 잘 봐요?”
  ‘물론 거짓말이지. 내가 몇 년 뒤의 일을 어찌 알겠어? 어차피 지금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니 대출 말하는 거지.’
 
  손금 본다는 명목 하에 오뎅걸의 손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둘 사이에 있던 경계심 같은 것이 누그러져 있었다. 손을 통해 서로의 체온이 전달되었기 때문일까? 대우는 만족해하며 손금 보는 것을 마쳤다.
 
  대우는 이제 4차 계획에 돌입했다. 4차 계획이 아주 신중하고 예민하다는 것을 대우는 잘 알고 있었다. 뺨을 얻어맞느냐 아니면 어제와 오늘의 커피값, 오뎅값, 맥주값, 콜라값을 보상받느냐 하는 아주 긴장된 순간이기 때문이다.
 
  대우는 눈을 풀 수 있는 데로 최대한 풀었다. 마치 잠자다가 방금 일어난 모양으로 눈을 풀고 오뎅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나 너에게 반했다’란 식의 눈빛에 오뎅걸도 분위기를 느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 있다가 대우는 천천히 손을 오뎅걸의 어깨에 얹었다. 반항은 없었다. 대우는 성공의 박수소리가 어딘가로부터 들려오는 환청을 느끼며, 얼굴을 오뎅걸의 얼굴에 점점 가까이 대었다. 아직까지 반항이 없는 것을 보면 거의 99.9999 퍼센트는 성공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 신이여. 드디어 커피값, 오뎅값, 맥주값, 콜라값을 보상받나이다. 기뻐하소서.’
 
  대우의 입술이 오뎅걸의 입술에 거의 붙을 쯤에, 뜻밖에도 오뎅걸이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모든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대우는 서둘러 ‘오뎅걸이 키스를 거절할 경우’를 예상하여 세웠던 보조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내가 싫어요?”
  대우는 최대한 목소리를 조용하게 깔면서 말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요?”
  “너무 이른 거 같아서요. 우린 한번 밖에 만나지 않았잖아요.”
  “......”
  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역시 보조계획 중에 있었던 것이었고, 대우가 침묵을 깨뜨릴 기미가 없자 오뎅걸은 하는 수 없이 말했다.
 
  “내일 해요.”
  갑자기 하늘에서 콰과광 천둥이 치는 듯했다. 오뎅걸의 그 말은 계획에 전혀 없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싫어요’ ‘생각해보고요’란 말은 계획에 있었고, 그 말에 대한 답변 역시 철저하게 준비를 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내일’하자니.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일 할 수가 없는 이유가, 내일은 돈이 5백원 밖에 없다. 그 5백원으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 수 있을까?
 
  대우의 머리는 혼란스럽게 회전하며 마땅한 대답을 찾기 위해 사정없이 돌아갔다. 그럴수록 침묵의 시간은 오래 지속되었고, 자칫 잘못하면 오뎅걸이 ‘이만 나가요’란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싹터오기 시작했다. 대우는 서둘러 말을 해야만 했다. 오로지 먹지 못한 오뎅을 위해서.
 
  “내일은 없어요. 내일이 오면 다시 내일이 있잖아요. 내일은 절대 지금일 수가 없어요.”
 
  대우는 자신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맥주값을 비롯하여 커피값, 오뎅값이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가는 환상을 보았다. 모든 계획이 실패했으니 깔끔하게 포기하자 마음먹은 찰라, 대우는 오뎅걸이 침묵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침묵의 뜻을 대우는 눈치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순간 그는 하늘을 마구 날고만 싶어졌다.
 
  ‘성공이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팡파르를 부르며 그를 축복해 주는 듯했고, 어제 먹지 못했던 오뎅들이 춤을 추며 그에게 박수를 보내는 듯했다.
 
  대우는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오뎅걸은 피하지 않았고, 둘의 입술은 본드를 바른 것처럼 찰싹 달라붙고 말았다.
 
  ‘오, 신이여. 커피값이여, 오뎅값이여, 맥주값이여, 콜라값이여. 그대들은 아는가. 어제 이 여자의 입 속으로 들어갔던 오뎅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를. 그러나 이제 부럽지 않나니. 왜냐면 그 입술은 이제 나의 입술과 상봉을 했기 때문이라네.’
 
  대우는 한동안 그렇게 여자의 입술을 빨고, 잠시 쉬기 위해 얼굴을 들었다. 오뎅걸 역시 눈을 뜨고 풀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오뎅을 먹던 그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였다. 대우는 다시 한번 오뎅걸의 입술을 덮쳤다.
 
  꽤나 오랜 시간동안 서로의 입김을 교환한 뒤에 얼굴을 떼었다. 오뎅걸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고, 대우도 역시 불그스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우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오뎅걸의 입술 촉감을 음미했다. 행복한 기분에 너무 오랫동안 그 흔적을 음미했는가 보다. 다시 키스를 하려 할 때, 오뎅걸이 일어서며 ‘이만 나가요’했던 것이다. 대우는 아차 했다.
 
  ‘괜찮아. 이미 키스는 했는걸 뭐. 내일 또 하면 되지.’
  대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히 쳐져 있어야 할 커튼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대우는 그제야 화장실에 가야한다고 하면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 너무 계획에만 몰입한 나머지 커튼을 치지 않은 사실이 기억났다.
 
  커튼 밖에서 생생한 라이브 쇼를 관람한 손님들과 종업원들의 동그래진 눈동자가 모두 자신을 향해 있음을 알았을 때, 대우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우와 오뎅걸은 창피함에 고개를 숙인 채로 커피숍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대우는 살았다는 듯이 커다랗게 기지개를 꼈다. 대우는 이제 홀가분한 기분이 되었다. 어제와 오늘 썼던 피 같은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고, 남은 휴가동안 옆에 차고 다닐 수 있는 뜨끈한 난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대우의 그 날 하루는 그것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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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철이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휴가를 하루 남긴 날, 아침이었다.
 
  “대우 형, 소개팅 할래요?”
  대우의 귀가 솔깃해졌다. 하지만 오후에 오뎅걸에게 전화가 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쉽게 약속을 할 수 없는 실정을 깨닫고는 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글쎄, 잘 모르겠다. 오후에 약속이 있거든.”
  “그래요? 2시에 행복카페에서 소개팅 하려고 하거든요. 시간 있으면 오세요.”
 
  “응, 알았어.”
  전화를 끊자마자 대우는 행복카페란 말에 치를 떨어야 했다.
  ‘하필이면 행복카페람.’
  그는 방바닥에 누워 행복카페란 단어를 지우기 위해 오뎅걸과 달콤하게 보내었던 어제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여자는 한 번 맛을 들이면 계속 달라붙는다는 헌팅의 교훈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 왜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경험을 한번도 안 했다는 여자는 있어도, 경험을 한번만 했다는 여자는 없다고.
 
  어둠침침하고 으슥한 카페에서 장장 1시간동안 입술을 빨고, 핥아대던 촉감이 아직도 입술에 남아있는 듯했다. 한번 키스에 맛 들린 오뎅걸은 그가 접근하면 외면은커녕 오히려 먼저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여자는 역시 요물이야.”
  하지만 자존심은 아직 남아있는지 허리 아래는 허락해 주지 않았다. 대우는 그래도 느긋한 마음으로 여자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차곡차곡 세워나갔다. 말년휴가가 끝나고 조금 있으면 제대를 하게 된다. 군입대 전에 다니던 대학에 복학하기까지는 다섯 달 정도 남았으므로 시간은 충분했다. 설마 그 사이에 허리 아래쪽까지 성공시키지 못할 소냐.
 
  그런 생각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자신의 행복스러운 상상을 깨어버린 고물 기계식 전화기의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면 잽싸게 수화기를 들었다.
 
  오뎅걸의 귀여운 목소리가 대우의 가슴을 또다시 설레게 만들었다.
 
  오뎅걸은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만날 수 없다는 내용을 1시간동안 주절거린 뒤에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뒤 대우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2시까지는 아직 20분 정도 남아있었다.
 
  “오늘은 오뎅걸과의 썸씽을 만들 수 없게 되었으니 슬슬 소개팅에나 나가볼까?”
 
  대우는 수많은 소개팅의 경험이 있었기에 소개팅에 나갈 때는 절대 만원 이상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다. 소개팅의 성공 사례를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자신의 경험으로도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와는 거의 다가 일회용으로 끝나버렸기 때문에, 일부러 많은 돈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소개팅 철학이었다.
 
  소개팅이 이루어지고, 짝을 지어 단 둘이 2차를 가게 되면 대우는 천연덕스럽게 호프집이나 레스토랑으로 간다. 그리고 맛있게 먹고 나서는,
 
  “나 돈 없다. 그러니 배를 째던지 말던지 해라.”
  란 말로 여자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는다. 그러면 여자는 속으로 엄청 욕을 하지만 맥주값이나 음식값은 내고 나간다. 물론 그 뒤에 여자로부터 연락이 오지는 않지만, 대우는 기분이 좋게 그 날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공짜로 맥주와 고급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일부터 돈 싸들고 나가서 여자의 호감을 사기 위해 이것저것 사주는 일은 죽어도 하지 않는 게 그의 소개팅 신조였다. 그렇게 해봐야 떠날 여자는 떠나가고 말 것을 뭐 하러 돈을 써. 그럴 바에는 안면 까고, 배 째라고 하면 공짜로 술도 먹고, 배도 채우는데.
 
  대우는 슬슬 얼굴을 치장하고, 늘 입던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백원짜리 동전이 하나 나왔다. 오뎅걸과 첫키스를 하던 날, 그녀가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남았던 5백원으로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주고 남은 동전이었다.
 
  그 다음 날, 오뎅걸을 만났을 때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솔직담백하게 이야기했고, 그 이후로의 데이트 비용은 전부 오뎅걸의 차지가 되었다. 그래도 오뎅걸은 싫은 내색하지 않았기에 대우는 오뎅걸이 바로 봉이구나 하는 생각에 즐거워했었다.
 
  대우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짧은 머리를 손보고, 밖으로 나와 행복카페를 향해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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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우는 솔직히 행복카페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그곳이 못마땅했다. 행복카페란 단어만 들으면 군입대 전에 일어났던 천일 공노할 일들이 물결처럼 그의 뇌신경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나? 군 입대를 몇 개월 앞두고 - 그 당시에는 군 입대 통보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 두 아가씨에게 양다리를 걸친 적이 있었다. 레코드걸과 현충사걸이 바로 그 장본인들이었다.
 
  레코드걸은 동생 생일 선물로 레코드를 선물하려고 가게에 들렸다가 만나게 되었다. 어울리지 않게 음악을 좋아했던 대우는 레코드 가게에서 일을 하는 그녀의 긴머리와 순수한 눈빛에 반하여, 쓸데없이 레코드 점에 자주 들려 없는 돈으로 필요 없는 레코드를 많이 사 갔었다. 그런 엄청난 물질적 투자와 시간의 투자 덕인지 이제는 그가 나타나면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가벼운 대화를 걸어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쯤에서 본격적으로 꼬실 의향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저 혹시 퇴근하고 시간 있으세요?”
  레코드걸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쉽사리 거절하지 않는 것을 보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뜻하기에 그는 재차 말했다.
 
  “저도 저녁 때 할 일이 없거든요. 그래서 커피나 마시며 음악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래요.”
 
  레코드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때 그들은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고, 대우 특유의 꼴값으로 여자는 숨쉴 틈도 없이 웃어대었다. 그 날 이후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자부하고는 자주 연락하여 그녀를 불러내었고, 레코드걸은 서슴없이 약속 장소로 나왔다. 그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된 듯 싶었다.
 
  대우는 밤새워 레코드걸에게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웠고, 다음 날에 어김없이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하지만 레코드걸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대우가 여태껏 헌팅 했던 여자들과는 달리 레코드걸은 순수한 의미로 대우를 만났던 듯 싶다. 그래서인지 대우의 점보는 작전에도 넘어가지 않았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핸섬한 얼굴에 연민을 유발시키는 두 눈동자에게도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거의 한 달이란 기나긴 시간이 지나도록 레코드걸의 입술을 훔치지도 못하고, 손을 잡는 것만으로 만족을 하게 되자 슬슬 실증이란 단어가 그녀를 만날 때마다 머리에 떠올랐다.
 
  그래서 사귀게 된 것이 현충사걸이다.
  대우는 자신도 왜 현충사에 혼자서 갔는지 모른다. 그냥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갔다고 지금도 생각하기는 하지만 불행의 신이 자신에게 은밀하게 지시를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대우는 현충사에 놀러갔고, 그곳에서 표를 판매하는 아가씨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더 이상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다짜고짜 그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고, 몇 시간만에 저녁 데이트 허락을 따내었다. 아마도 너무 필사적으로 매달리자 가엾어서 허락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중요한 건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니까. 하하하.
 
  그것이 불행을 알리는 종소리였다는 것도 모르고 대우는 기분 좋게 웃어버렸다.
 
  현충사걸과의 데이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재미 그 자체였다. 성격이 활달한 현충사걸은 대우 못지 않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놓았고, 대우 역시 푼수 기질을 발휘하여 상대를 웃기려 했다. 그들의 대화는 서로를 얼마나 웃기게 하는가의 시합 같았을 정도였다.
 
  레코드걸과의 만남이 뜸해짐과 동시에 현충사걸과의 만남이 잦아지던 어느 날, 이제는 계획에 돌입해도 되겠지 하는 설렘을 안고 그녀를 만났다.
 
  현충사걸은 조용하고 괜찮은 카페를 발견했다며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조용하다는 말에 대우의 귀가 솔깃해졌다. 조용하다는 것은 커튼이 드리워진 곳이란 이야기겠지? 그럼 계획을 진행시키기에는 안성맞춤의 장소가 아닌가 말이다. 대우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현충사걸의 인도를 받아 행복카페란 이름이 붙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카페 안에는 손님들이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커튼이 드리워진 테이블에 앉으면 손님이 많건 적건 상관이 없지 란 생각을 한 대우는 커튼이 드리워진 테이블을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충사걸은 정 중앙에 있는 테이블, 그것도 손님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테이블에 먼저 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대우는 당황했다.
  ‘괜찮아. 까짓 거 분위기가 무르익은 다음에 장소를 옮기면 돼.’
 
  그는 스스로 위로하며 현충사걸의 맞은 편 자리에 엉덩이를 깔았다.
 
  여 종업원이 물컵과 메뉴판을 그의 앞에 내 놓았다. 대우는 메뉴판을 펼쳐 현충사걸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뭐 먹을까, 자기?”
  자기 딴에는 부드럽게 말한 것인데, 그녀의 표정이 똥 씹은 얼굴로 변해버리자 대우는 당황하고 말았다. 괜히 ‘자기’란 호칭을 붙였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조심스럽게 접근할 걸, 너무 서둘렀다고 생각하는 순간 현충사걸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아직도 옆에 서 있는 여 종업원에게 향해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대우는 아무 생각 없이 여 종업원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하늘에서 노란 불꽃이 번쩍하고, 지각이 무너지며, 땅이 갈라지는 듯한 충격이 시신경을 통해 뇌를 자극하는 한편, 뇌로 전달된 충격이 온몸에 퍼져있는 모세혈관을 타고 내려와 손을 저절로 흔들리게 만들었다. 대우는 그만 잡고 있던 물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레코드걸의 쌀쌀한 눈초리가 아직도 자신에게 박혀있다는 걸 알자 그는 고개를 외면하고 말았다. 현충사걸의 시선이 대우에게로 옮겨오자 그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팬티 속마저 땀으로 범벅이 되고 있는 위기의 이 순간을 구해준 것은 현충사걸이었다. 현충사걸은 한없이 대우를 쳐다보는 레코드걸에게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레코드걸은 현충사걸을 돌아보고는 잠깐동안 질투의 시선을 던진 다음 곱게 물러났다.
 
  그녀가 물러간 것을 알자 대우는 변명의 말을 찾기 시작했다.
  ‘맙소사, 맙소사. 도대체 레코드걸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녀는 내가 현충사걸에게 ‘자기’라고 부른 걸 들었을 게 틀림없어. 이제 양다리는 끝이란 말인가. 오 나의 신이여.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좋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비전 없는 레코드걸은 버리고 현충사걸을 잡겠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뭐라고 변명을 해야하지? 친구? 여동생? 친척? 여동생의 친구? 우와, 미치겠네. 왜 이렇게 좋은 변명이 생각 안 나지. 내 머리는 돌이란 말인가?’
 
  현충사걸이 그의 생각하는 시간을 방해하듯 말했다.
  “대우 씨, 아는 여자예요?”
  “응? 응. 조금 아는 여자야. 예전에 나를 좋아한다면서 마구 쫓아다니던 여자야. 신경 쓰지 마.”
 
  얼떨결에 말을 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유치한 - 속보이는 변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들어 현충사걸을 쳐다보니 그녀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마치 대우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기 위해서라는 듯.
 
  대우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있었다. 밤새워 새웠던 계획을 실천하고 자시고도 이제는 필요 없다. 어서 이 카페를 나가고 싶은 심정만이 굴뚝같았다. 커튼이 드리워진 테이블은 그에게서 멀리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리는 듯했다.
 
  레코드걸이 다시 다가오더니 커피를 테이블에 꽝하고 내려놓고, 다시 한번 대우를 째려보고는 물러났다.
 
  대우는 자신 앞에 놓여있는 커피만을 멀거니 쳐다볼 뿐이었다. 마시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현충사걸이 느닷없이 커피를 들더니 바닥에 쏟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저 여자가 미쳤나? 저 아까운 커피를...’
  대우는 화들짝 놀라며 현충사걸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커피를 쏟아 이제는 빈 잔이 된 커피잔을 테이블에 도로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바닥에 쏟은 커피를 핥아요. 그럼 대우 씨 말을 믿겠어요.”
  현충사걸은 한 성격 하는 여자였던 것이다. 눈앞이 노랗게 변하고, 앞에 앉은 현충사걸이 마녀로 보이기 시작했다. 대우는 이런 일을 시키는 현충사걸을 저주하고 원망하고 뺨이라도 한대 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현충사걸은 떠나가 버리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럼 주위에는 여자라고는 한 명도 없게 된다. 여자 없는 하루하루는 지옥의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와, 신이여,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대우는 용기 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충사걸을 노려 본 다음,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때리는 대신에 있는 힘을 다해 허리를 굽혀 바닥에 흘린 커피를 향해 큰절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머금고 커피를 핥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과 자존심을 누르기 위해 스스로 위로했다.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여기에 아는 사람은 없다. 레코드걸은 이제 내 여자가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 현충사걸마저 없어질 바에는 차라리 커피를 핥는 게 낫다. 여자 없이 혼자 보내느니 차라리 이 짓이 낫다.’
 
  그의 그 경이로운 행동에 손님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따갑게 느껴졌다. 그 눈빛이 의미하는 뜻을 대우는 잘 알 수가 있었다.
 
  “저 놈, 남자 망신을 다 시키고 있잖아.”
  “너무 한다. 저런 짓을 하고 싶을까.”
  “어머, 너무 멋있다. 그이한테도 한 번 시켜볼까.”
  대우는 무참하게 집 밟힌 자존심을 가슴에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현충사걸에게 자신 있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냥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대우는 현충사걸의 뒤를 쫓아 행복카페를 나가면서 자신을 보고 있는 레코드걸을 힐끔 돌아보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녀는 레코드 점을 그만두고 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중이었단다. 그녀는 대우의 시선을 받자 야멸 차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제 끝났다는 의미이리라. 이제 대우에게는 현충사걸만이 남게 되었다. 두 마리의 토끼 중에 한 마리만 남은 것이다. 그 한 마리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뒤를 쫓아가 봐야 이미 차갑게 변한 현충사걸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레코드걸과 끝난 것은 물론이거니와 현충사걸도 그를 쌀쌀하게 대했다. 그래서 결국 두 마리의 토끼를 놓치고 만 것이다.
 
  그 이후로 행복카페란 이름만 들으면 치가 떨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그 카페에서 소개팅을 하는 거지?
 
  ‘괜찮아. 소개팅인데, 뭐. 설사 오뎅걸이 그곳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다고 해도 핑계를 댈 수 있어. 지는 소개팅 안 해 봤겠어? 병철이가 억지로 나오게 했다고 변명하면 돼.’
 
  그는 행복카페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고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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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카페의 안은 3년 전과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어 보였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조용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주인의 솜씨로 장식된 실내 디자인 역시 두 마리의 토끼를 잃었던 그 날과 전혀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는 여러 명을 위해 마련해 놓은 넓은 테이블 쪽을 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남자답지 않게 예쁘장하게 생긴 병철이 역시 그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대우는 병철이 맞은편에 이미 와 앉아있는 3명의 아가씨를 발견하고,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억지로 활짝 웃으며 걸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 발을 내딛자 그는 바늘이라도 밟은 것처럼 멈칫했다. 3년 전 자존심을 무참히 내팽개치고 바닥에 쏟아진 커피를 핥던 곳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눈에는 일반 바닥과 별 차이 없이 느껴질지는 몰라도 그의 눈에는 아직까지도 현충사걸이 쏟아버린 커피자국이 남아있는 듯했다.
 
  옛 생각이 밀려오는 통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병철이 옆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서대우라고 합니다.”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아가씨들에게 자기소개를 하는 그의 귀에 병철이가 속삭였다.
 
  “대우 형, 오늘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대우가 병철이의 귀를 잡고 속삭였다.
  “약속? 취소했어. 아무렴 소개팅인데 내가 빠질 수 있나.”
  병철이가 아픈 귀를 만지고는 대우의 귀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나도 대우형이 나올 줄 알았어요.”
  3명의 아가씨 중 하나가 말했다.
  “에이, 재미없다. 자기들끼리만 귓속말하고. 그냥 갈까보다.”
  대우가 활짝 웃으며 그 아가씨에게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나온 아가씨들이 너무 예쁘다는 말을 했어요.”
  말을 한 대우는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난 거짓말에는 약한가 봐.’
  대우는 여자들의 소개를 받으며 그들의 얼굴을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제일 왼쪽에 있는 아가씨는 몸에 비해 작은 얼굴을 하고 있어 어리게 보였는데,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 파마를 한 듯했다. 가운데 앉은 아가씨는 얼굴이 동그스름하고 눈이 커 대우의 맘에 쏙 들었다. 눈이 크다는 이야기는 인정이 많고, 눈물이 많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단 둘이 데이트를 할 때, 남자가 돈이 없다 해도 화를 내지 않고 선뜻 돈을 계산할 타입 - 즉, 대우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 같았다. 맨 오른쪽의 아가씨는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워 보였다. 눈초리가 양미간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성질 역시 포악하거나 사나울 듯 싶었다. 만일 대우와 단둘이 맥주를 들이키다가 돈이 없다고 하면 그의 뺨을 갈기고 그냥 나가버릴 듯한 인상이었다. 대우는 저 여자를 조심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가운데 여자를 포획하기 위한 작전을 짰다.
 
  ‘으음, 그런데 별명을 뭐라고 지어야 하지? 눈이 크니까 대안걸? 이상한데. 얼굴이 동그라니까 동글걸? 원걸? 에이 그냥 소개팅에서 만났으니까, 소개걸이라고 불러야겠다.’
 
  병철이가 갑자기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그는 고개를 돌려 병철이를 돌아보자 병철이가 아가씨들 쪽으로 눈짓을 했다.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대우는 아가씨들 쪽을 돌아보고, 아가씨들의 초롱초롱한 눈들이 자신에게 향해 있는 것을 알고는 당황하고 말았다.
 
  ‘내가 딴 생각을 하고있는 사이에 무슨 말이 왔다갔다 했나봐.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이 잘생긴 얼굴을 계속 쳐다보는 거지?’
 
  다행스럽게도 가운데 앉은 아가씨가 손을 그에게 내밀며 말했기 때문에 병철이가 아가씨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점 잘 보신다면서요? 제 손금 좀 봐주실래요?”
  “아하, 손금요? 하하, 제가 이래봬도 10년 동안 계룡산 도단 바위에서 도단 스님에게 손금을 배웠지요. 자, 그럼 어디 손을 내밀어 보세요. 으음, 참 손금이 좋군요.”
 
  그는 목소리를 최대한 깔고는 가운데 아가씨 - 소개걸이 내민 손을 필요이상 만지작거리며 손금을 보았다. 그는 있는 말, 없는 말 모두 꺼내어 소개걸의 환심을 사려 애썼다. 보람이 있었는지 소개걸은 그가 내뱉는 말에 감탄을 하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대우는 보드라운 소개걸의 손을 이리저리 만지며 손금을 계속 봐 주었다.
 
  “결혼은 연애할 경우가 90퍼센트이고요, 결혼할 남자는 아가씨가 생각하는 이상형과는 정반대인 남자예요. 그리고, 지금 가까운 곳에 있는 남자가 남편이 될 확률이 높아요.”
 
  ‘그게 바로 나지.’
  “정말, 잘 보시네요? 어떻게 그렇게 잘 보세요?”
  소개걸의 말에 대우는 허세를 부리며 웃고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굴이 오뎅걸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옆에 차고 다닐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큰 눈이 정말 매력덩어리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가 아쉬워하며 소개걸의 손을 놓으며 손금을 마치자, 왼쪽, 오른쪽에 있는 아가씨들이 자신의 손을 그에게 쑥 내밀며 자기들도 봐 달라고 보챘다.
 
  ‘으이그. 지겨워라. 양쪽 아줌마들은 엑스트라란 말이야. 엑스트라의 손금까지 봐 줘야 하나.’
 
  그는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이미지 관리상 웃으며 그들의 손금을 모두 봐 주었다. 양쪽 아가씨들은 입에 침을 바르고, 정말 족집게라고 떠들어대었으나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가운데 앉아있는 소개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말에만 귀를 기울었다.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대우가 소개걸에게 물었다.
  “저, 별명이 있을 거 같은데, 별명이 혹시 왕누니 아닌가요?”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왕누니 맞아요.”
  ‘소개걸 대신 왕누니걸이라고 할까?’
  “그리고 모롬이라고도 해요.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거든요.”
  ‘모롬이? 모롬걸? 우와, 별명 죽인다. 앞으로 모롬걸이라고 불러야지. 모르는 거 있으면 이 아저씨에게 다 물어봐. 내가 다 가르쳐 줄께.’
 
  대우는 말을 꺼내는 소개걸 - 모롬걸의 입술을 찢어져라 쳐다보면서 저 입술의 맛은 어떨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소개팅의 자리는 역시 대우의 독차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대우의 꼴값과 푼수기질이 이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었고, 여자들은 넋을 잃고, 대우의 쉴새없이 움직이는 입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가끔 병철이가 끼어 들어 이야기를 했을 뿐, 1시간 중 50분은 그 혼자서 떠들어대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익어가자 서로 짝을 지어 나가자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대우는 모롬걸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제발 저 여자랑 짝이 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파트너를 정하는 데에는 고전적인 방법이 택해졌다. 여자들의 소지품을 남자들이 선택해서 파트너를 고르는 곰팡내 나는 방법이기는 했지만, 대우는 안심을 했다. 여자들이 고르는 짝짓기 방법이라면 모롬걸이 자신을 택할 확률이 33.33333 퍼센트이지만, 남자가 고르는 입장이므로 확률은 50 퍼센트로 늘어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내 놓은 물건 - 손수건, 립스틱, 귀걸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 중 모롬걸의 물건이 어느 것일까 고민과 갈등에 휩싸였다.
 
  ‘손수건에 빨간 립스틱 자국이 있는 것을 보면 모롬걸 것이 아냐. 빨간 립스틱은 뱁새 눈 아줌마 것이 틀림없어. 립스틱 역시 엷은 핑크색인 것으로 보아 모롬걸 것이 아니겠지. 모롬걸은 립스틱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귀걸이가 틀림없구나.’
 
  대우는 모롬걸이 귀걸이를 차고 있었나 떠올려 보려 했지만,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모롬걸의 큰 눈만 쳐다봤지 귀에까지 볼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귀걸이라고 확신하면서도 망설여졌다.
  ‘만일에 아니면 어쩌지. 뱁새 눈 아줌마나 파마머리 아줌마 거면 어떻게 하지.’
 
  그가 망설이는 사이에 병철이의 손이 쑥 나오더니 귀걸이를 덥석 잡는 것이었다. 대우는 불에 댄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병철이의 손에 집혀져 가는 귀걸이를 얼른 잡아 뺐다. 병철이가 눈을 깜빡거리며 자신을 보자, 그는 이빨을 들어내 놓으며 씩 웃었다.
 
  그렇게 해서 대우는 귀걸이, 병철이는 손수건,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립스틱을 집게 되었고, 여자들에 의해 긴장되는 발표 시간이 다가왔다.
 
  “립스틱은 제 꺼예요.”
  “손수건은 제 껀데.”
  “저는 귀걸이.”
  대우는 눈앞이 아찔해 지는 것을 느꼈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 머리가 몽롱해지는 듯했다. 그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 신이여. 나를 도와주시는군요. 아아, 정말 감사하나이다.’
 
  귀걸이는 모롬걸의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파트너가 된 모롬걸과 함께 지겨운 행복카페를 벗어났다. 그리고, 호프집으로 가자고 제의를 하니 모롬걸이 선뜻 승낙했다.
 
  호프집으로 향하며 그는 철저하게 계획을 짜 보았다.
  지금 이 순간을 같이 맞이하는 모롬걸은 오뎅걸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꼬시는 방법 역시 새로이 해야할 듯 싶다. 오뎅걸을 꼬시던 수법 가지고는 입은커녕 손도 만지기 힘들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더군다나 그의 헌팅 수법 중 하나인 손금작전은 이미 써버렸으니 별 효능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작전, 다른 계획이 필요하다. 그는 머리를 굴리며 온갖 계획들 - 그가 여태껏 헌팅을 해오며 짜낸 계획, 친구들로부터 들은 계획, 잡지, 소설, 영화에서 보았던 헌팅 계획 등 - 을 총동원하여 적당한 계획을 찾기 시작했으나, 어느새 호프집에 도착해 버리고 말았다.
 
  대우가 안주를 물어보자 모롬걸이 골뱅이를 선택하였기에 종업원에게 골뱅이와 피쳐 하나를 시켰다.
 
  “골뱅이 싫어하지는 않죠?”
  “천만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안주가 바로 골뱅인 걸요.”
  ‘으, 하필이면 골뱅이가 뭐야. 그 매워 빠진 걸 여자들은 왜 그리 좋아하는지 몰라.’
 
  대우는 몇 가지 재미있는 유머로 모롬걸을 웃겼다. 그러자 단 둘만이 있다는 것에서 생기는 어색함이 사라졌는지 모롬걸의 말문이 뻥하고 뚫렸다. 모롬걸 역시 대우만큼이나 말이 많은 여자였다. 대우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호프집으로 오던 중에 생각하다 만 계획을 다시금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맥주가 그들 앞에 내놓아지고, 골뱅이가 놓여지는 중에도 그는 생각에 몰두했다. 모롬걸이 오이에 파묻혀 있는 골뱅이를 모조리 파헤쳐 먹었을 쯤에야 대우는 자신의 계획에 만족 띤 미소를 지을 수가 있었다.
 
  ‘하하하. 완벽해. 내가 생각해도 너무 완벽한 계획이야.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과 칵테일. 그리고 몇 가지 의미 있는 말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하하. 앗!’
 
  자신의 계획에 푹 빠져있던 그는 그만 기절할 만큼 커다란 오점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렇게 열심히 짠 계획이건만, 그런 커다란 오점이 있었다니. 그는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술 안 드세요?”
  “아뇨, 마셔야죠. 자, 건배.”
  대우는 쓰디쓴 맥주를 들이키며 자신의 쓰라린 가슴을 어루만질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과 칵테일. 빌어먹을. 고작 100원 가지고 레스토랑에 갈 수 있을까? 레스토랑은커녕 집에 가서 빈대떡 붙일 수도 없는 돈이지 않은가. 오뎅걸을 괜히 꼬셨다. 그때 그 돈이면 모롬걸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건데.
 
  대우는 주머니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100원 짜리 동전 하나를 떠올리며 엄청 밀려오는 후회의 물결을 쓰디쓴 맥주와 함께 들이키고 있었다.
 
  ‘먹지도 못한 오뎅에 너무 집착한 게 실수였어. 그것 때문에 더욱 악착같이 오뎅걸에게 매달린 건데.’
 
  그의 착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롬걸은 자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해 대고 있었다.
 
  ‘오뎅걸에 비하며 모롬걸이 더 나은데. 비록 얼굴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저 서글서글한 말투며, 큰 눈이며 정말 마음에 들어. 그에 비해 오뎅걸은 어딘가 모르게 차갑고 쌀쌀한 분위기를 자아낸단 말이야. 그렇게 쉽게 입술을 주었다는 건 다른 남자에게도 쉽게 입술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고, 그렇다면 조만간 나를 차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겠지? 그에 비해서 이 모롬걸은 내가 싫어져도 절대 차버릴 여자가 아냐. 저 큰 눈,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저 눈. 아아, 정말 아깝다.’
 
  오뎅걸과 모롬걸을 비교하면 할수록 모롬걸에게 더욱 마음이 끌렸다. 모처럼 소개팅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는데, 돈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헤어져야 하다니. 결국 이 맥주값을 모롬걸에게 뒤집어씌우고 도망가야 한단 말인가.
 
  대우는 열심히 마셔대는 모롬걸의 큰 눈을 다시 한번 보았다. 이제 저 큰 눈도 마지막이겠군.
 
  대우는 모롬걸의 큰 눈이 가늘게 움츠려지면서 자신을 째려보는 상상을 해 보았다. 맥주값도 없는 무능력한 남자를 보는 여자의 눈빛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맥주값을 모롬걸에게 뒤집어씌우고 나서 다음에 또 만나자고 하면 만나주지 않겠지?
 
  ‘왜 내 주머니는 항상 가난한 것일까? 정말정말, 슬프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그는 모롬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에 있는 100원 짜리 동전을 떠올리며, 슬프지만 과감하게 그녀를 포기하기로 결심하자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그래, 어차피 소개팅을 한 목적은 공짜로 술 먹기 위해서였잖아. 인간 서대우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도 배우자, 응.’
 
  그래도 너무 아쉬웠다. 쩝.
  모롬걸이 말했다.
  “그런데, 여자 친구 없으세요?”
  ‘잉? 이 아줌마가 갑자기 여자 친구는 왜 물어보지?’
  대우는 여자가 이런 질문을 하는 심리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조금씩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친구는 있어요.”
  ‘이렇게 말함으로써 질투심을 약간 유발시키는 거야.’
  “애인은 없으신가 봐요?”
  “애인은 아직까지 없어요.”
  ‘아줌마가 내 애인 해주면 되잖아요. 그 자리는 언제나 비어있다고요.’
 
  “저, 혹시 좋아하게 된 사람한테 좋아한다는 말 꺼낸 본적은 있으세요?”
 
  “글쎄요.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죠?”
  “아까 손금 봐주실 때, 제 남편 될 사람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하셨잖아요?”
 
  ‘물론,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이지. 근데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하네.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사실은요, 좋아하기 시작한 남자가 가까운 곳에 있어요.”
  “아, 그렇구나. 그게 누군 데요?”
  대우는 잔뜩 긴장을 한 채 모롬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모롬걸은 계속 이야기를 빙빙 돌리기만 했다. 답답해진 대우는 자신이 먼저 선재공격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혹시, 아까 소개팅 하던 남자들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 아니에요?”
 
  “어머?”
  ‘저 놀라는 표정. 역시 구나. 역시, 나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대우는 마구 날뛰고 싶어졌다. 호프집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악수를 청하고 싶어졌고, 여 종업원을 꽉 끌어안고만 싶어졌다. 아니야. 성급하면 안돼. 성급함은 금물. 절대 침착. 인간 서대우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대우 씨 말이 맞아요. 아까 소개팅 하던 남자들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좋아한다고 말해 보지 그래요.”
  ‘어서 좋아한다고 말해 줘요. 나도 아줌마를 좋아하려고 해.’
  “그런데, 용기가 나지 않아요.”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데 용기가 무슨 필요겠어요. 솔직하게 말하는 게 끙끙 앓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럴까요? 하지만 상대가 나를 싫어하면요?”
  ‘난 아줌마를 싫어하지 않아요. 제발, 빨리 말해줘요. 좋아한다고.’
 
  “만일 상대도 아줌마를 좋아하면요? 결국 마찬가지잖아요. 확률이 반반이라면 해 보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저 같으면 좋아한다고 말하겠어요.”
 
  “그치만.”
  모롬걸의 망설이는 표정이 대우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냥 대우 씨를 좋아해요 란 말을 못한단 말이야? 정말 순정파구나. 이럴 때는 내가 먼저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냐, 이런 경우에는 누가 먼저 좋아하냐는 말을 꺼내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져. 남자가 먼저 좋아한다고 하면 여자는 분명히 튕길 게 뻔한데 먼저 말할 필요가 없지. 그래, 지금 망설이는 것은 언젠가는 말하겠다는 증거이니까 기다려보자.’
 
  “이만 나가요.”
  “잉?”
  모롬걸이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우는 아차 싶었다. 저렇게 빨리 나갈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100원 짜리 동전이 있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맥주값을 모롬걸이 계산하는 것이 아닌가? 모롬걸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을 거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모롬걸이 계산해 버리자 그는 안심이 되었다. 위기는 넘긴 셈이니 말이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모롬걸의 말에 대우가 활짝 웃으며 가까운 바에 가서 칵테일이라도 한잔하는 게 어떠냐고 말하려다가 100원 짜리 동전을 떠올리고는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말로 바꾸어 말했다.
 
  모롬걸의 집 근처까지 왔을 때, 그녀가 말했다.
  “대우 씨는 좋은 사람 같아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조언까지 해주었잖아요.”
 
  대우가 웃으며 말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숨기지 않는 게 좋아요. 아줌마, 아니 아가씨가 좋아하는 남자 역시 아가씨를 좋아할 거예요.”
 
  “고마워요. 조만간 그 남자에게 제 마음을 이야기할 거예요.”
  ‘지금 해도 괜찮은데.’
  모롬걸이 작별인사를 하고 골목으로 사라지자, 대우는 하늘을 향해 번쩍 뛰어오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웬 미친놈하며 쳐다보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저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모롬걸이 자신을 좋아하는 이상 이 세상은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역시 내 눈은 정확했어. 내숭 떠는 다른 여자들과는 역시 틀리단 말이야. 술값도 자신이 선뜻선뜻 내고,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냐고 물어보는 것하며... 이제 조용하게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겠군. 대우 씨 나 당신을 좋아해요. 으히히히.’
 
  대우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머리 속은 온통 모롬걸의 큰 눈이 다 차지하고 있었다. 그 큰 눈 사이로 오뎅이 조금씩 비집고 나오자 그는 걱정이 생겼다.
 
  ‘이제 오뎅걸은 어떻게 하지? 양다리를 걸칠까?’
  갑자기 3년 전 행복카페에서 발생했던 사건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사실 오뎅걸을 포기하기에는 투자한 시간과 돈이 너무나 아까웠다. 비록 그 시간과 돈을 키스로 보상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꼬셔놓은 여자인데 쉽게 버린다는 게 그로서는 어지간히 힘들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모롬걸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결국 양다리를 걸쳐야 한다는 결론인데, 두 여자 모두 이 작은 도시에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3년 전의 악몽 같던 일이 또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정말 미치겠네. 난,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여자가 두 명씩이나 있는 게 이렇게 괴로운 일일 줄이야.’
 
  결국 그 날 밤은 그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다음 날 휴가를 마치고 복귀할 때는 새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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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장 서대우가 민간인 서대우가 되어 제대하는 날, 그는 쫄다귀들로부터 제대축하인사라는 명목으로 물벼락과 함께 주먹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는 눈물이 찔끔 흘러나오는 것을 머금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쫄다귀들과 이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시발시발. 손목을 확 비틀어 버릴까 보다.’
  쫄다귀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며 그는 3년 동안 감옥처럼 지내던 군부대를 벗어났다. 홀가분한 기분이,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그를 상쾌하게 만들었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는 버스의 창가에 기대어 창 밖의 시골풍경을 바라보며 오뎅걸과 모롬걸을 떠올려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말았다.
 
  말년휴가가 끝나고 군부대로 복귀하고서도 두 여자의 얼굴 - 오뎅과 큰 눈과의 갈등이 심하게 그를 괴롭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해결책을 찾지 못한 것이다. 두 마리의 토끼냐, 한 마리의 토끼냐. 한 마리의 토끼라면 오뎅이냐 큰 눈이냐의 선택의 갈등이 너무나 위협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둘 다 놓치기에는 아까운 여자들이었고, 3년 전의 일 때문에 양다리를 걸치기는 두려웠던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타고 나서도 망설여지기는 마찬가지였다.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와 축하한다는 부모와 여동생의 말을 들을 때에도 그의 찡그린 얼굴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 되어 오뎅걸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서야 그의 마음은 조금씩 한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제대 축하해요.”
  란 오뎅걸의 형식적인 인사로 시작하여 장시간의 대화가 오고갔다. 그런 와중에 대우는 실수인지 아니면 큰 눈이 대부분 차지해버린 잠재의식 때문인지 말년휴가 때 있었던 소개팅 이야기를 입밖에 내고 말았다.
 
  대우가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소개팅 했었어요? 괜찮은 여자도 있었겠네요?”
  “응, 물론 있었지.”
  자신도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모른다. 오뎅과 큰 눈 때문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지자 결국 그의 잠재의식이 대신 입을 움직인 건지도 모른다. 오뎅걸의 쌀쌀해진 음성이 고물 기계식 전화기의 수화기를 타고 그의 고막을 흔들어 놓았다.
 
  “대우 씨는 좋겠네요? 괜찮은 여자도 만나고. 그럼, 이제 난 끝인가요? 그럼, 잘 해봐요. 그 동안 즐거웠어요.”
 
  그리고는 무참하게도 ‘딸깍’소리가 다시 고막을 출렁이게 했다. 대우는 잠깐만 이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수화기에서는 뚜 하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잘 된 거야.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느니 한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게 낫지. 이제는 오뎅을 버리고 큰 눈을 잡는 거야. 근데 모롬걸한테서는 전화가 오지 않네? 오늘 내가 제대한 다는 걸 말해주었을 텐데. 내가 먼저 해볼까? 아냐, 이럴수록 차분하게 기다려야 돼. 내일쯤 전화가 오겠지.’
 
  그날 밤은 며칠만에 처음으로 푹 잘 수가 있었다. 밤새도록 큰 눈이 그의 주위에 맴도는 꿈을 꾸다가 전화벨소리에 잠을 깼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수화기를 번쩍 들어 올렸다.
 
  “대우 형? 제대 축하해요.”
  모롬걸이라고 예상했던 전화가 병철이의 전화이자 그는 김이 팍 새고 말았다.
 
  “지금 시간 있으면 행복카페로 나올래요? 제대 축하로 콜라 한잔 사드릴게요.”
 
  대우는 힐끔 시계를 올려도 보고는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1시간 뒤에 만나자.”
  대우는 덜 깬 상태에서 겨우 일어나 얼굴을 씻고, 머리를 감고, 이를 닦고, 아침을 마다한 채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좀 걸으니 행복카페의 간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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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철이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대우는 병철이 혼자라는 것에 약간 실망을 하며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너는 왜 맨 날 행복카페에서 만나자고 하는 거야? 난 여기가 싫단 말이야.”
 
  “난, 여기가 좋던데요. 분위기도 좋고, 음악도 좋잖아요.”
  “그래도 난 싫어. 다음부터는 다른 장소에서 만나자.”
  “안돼요. 난 여기가 좋단 말이에요.”
  언제나 부드럽게 말하는 병철이가 생각보다 똥고집이라는 걸 대우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 역시 이곳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비록 3년 전의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새롭게 떠오른 큰 눈 - 모롬걸을 만나지 않았던가. 그래, 앞으로 여기를 애용하자. 3년 전 나를 비극에 빠뜨렸던 이곳이 미안한 마음에 모롬걸을 소개시켜주지 않았던가. 그래, 좋다. 앞으로 자주 오마. 나에게 계속 행운을 주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갑자기 병철이가 말을 꺼내었다.
  “그런데, 대우 형. 그 아가씨 어땠어요?”
  대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 아가씨라니? 누구?”
  “말년휴가 나와서 여기서 소개팅 했을 때, 형이랑 파트너 된 아가씨 말이에요?”
 
  “아, 모롬걸. 괜찮은 아줌마더라. 그런데 그건 왜?”
  “형도 좋게 보았어요? 역시.”
  ‘네 형수 될 여자인데 당연히 좋게 보아야지, 임마.’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실은요, 어제 그 아가씨랑 만났어요.”
  “그래?”
  ‘결국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직접 못하고 병철이를 통해서 하려고 한 것이구나.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역시 순진한 여자인가 봐.’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아요?”
  ‘당연히 알지.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차마 직접 말을 못하고 대신 전해달라는 말을 했겠지. 후후.’
 
  “글쎄, 나를 좋아한데요.”
  ‘그래 나를 좋아하지. 응? 뭐라고? 이 녀석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무, 무슨 말을 했다고?”
  “나를 좋아한데요. 내가 너무 착하게 생겼데나. 하하하.”
  병철이는 여자처럼 웃으며 즐거워했고, 대우는 아찔하게 현기증이 밀려오는 것을 겨우 참아야 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럼 좋아한다는 남자가 내가 아니고 병철이였단 말이야.’
 
  “형도 축하해 줘요. 축하해 주시는 거죠?”
  “무, 물론이지. 하하, 역시 넌 여자한테 인기가 좋구나.”
  대우는 속이 부글부글 끊어 오르는 것을 참아야 했다. 그 여자는 내 꺼야 라고 병철이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들 무슨 소용이랴. 이미 떠나가 버린 토끼인 것을.
 
  대우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병철이가 의아하게 쳐다보는 것도 무시한 채 카페 안 공중전화기로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다. 오뎅걸이 전화를 받자 그가 말했다.
 
  “있지, 어제 내가 한 말...”
  딸깍.
  그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다시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려다가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한번 놓친 토끼는 다시 잡을 수 없다는 헌팅의 교훈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후회의 물결을 한 몸에 받으며 병철이가 있는 자리로 비틀거리며 갔다.
 
  그는 소리를 치고 싶었다.
  “난 행복카페가 싫어!”
  하지만 결국 그는 그 말을 하지 못한 채 애꿎은 담배만 입에 물고 꽉 씹어 버렸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왜 그날 오뎅을 그냥 남겨놓고 나왔는지를...
  카페 안에는 ‘너의 결혼식’이란 음악이 잔잔하게 깔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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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필로그
 
  대우는 혼자서 쓸쓸한 연인들의 밤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두 손을 청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로 걷는 그의 눈에 오뎅가게가 띄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여 동전이 얼마 있는지를 확인하고 오뎅가게로 몸을 들이밀었다.
 
  잠시 후에 따끈한 국물과 함께 오뎅이 나오자 그는 오뎅을 하나 입안에 넣고는 그 따스함과 쫄깃함을 음미했다.
 
  오뎅가게 안으로 늘씬하고 키 큰 여자가 홀로 들어와 대우의 옆자리에 앉자 그는 힐끔 여자를 쳐다보았다. 커트 머리에 귀여운 얼굴의 여자였다. 하지만 대우는 한숨만을 내쉴 뿐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남아있던 오뎅을 와그작 씹어먹고, 마지막으로 국물을 들이켰다. 그때 여자가 그에게 얼굴을 돌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대우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저, 오뎅 맛있나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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