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02. 마법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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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02. 마법의 성

행복 카페 이야기

Happy Cafe Story

이야기 둘

마법의 성

이정세 지음

 
  그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 카페에 첫 발을 딛었을 때부터 마법에 걸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 카페의 문을 열고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일반 여타 다른 카페에 비해 그리 특색이 있거나 내부 디자인이 멋들어진 것도 아닌데, 어딘지 모르게 포근하게 감싸는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난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 이름은 이건우. 현재 Y대 1학년을 거의 끝마쳐 가고 있는 풋내기 대학생이다. 마음에 드는 여자친구가 없는 것을 빼고는 내 자신에게 불만이 없었고, 나의 생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런 녀석이다.
 
  2학년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지난 1년은 여러 가지로 치여서 지낸 듯 싶다. 괜찮은 여자친구를 만들려고 미팅이란 미팅에는 꼬박 참석했지만, 늘어나는 건 치근덕거리는 여자들의 숫자뿐, 실속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특별히 시간 보낼 일이 없을 때, 그네들에게 전화를 걸면 곧장 나온다. 영화를 보거나 커피를 마시며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죽이는데 그네들이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역시나 친구란 호칭 외에는 의미 없는 애들이다. 그리고 별로 관심도 없다. 일단 친구로 지내자는 말로 관계를 못박아놓으면 흥미를 잃었다는 의미이고,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은 다 그런 사이였다.
 
  게다가 내 주위에 있는 여자친구라는 애들은 - 그녀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 내 외모와 내 화술과 내 주머니를 보고 따라다니는 골 빈 여자들뿐이다. 겉으로야 다정하게 웃으며 챙겨주는 척 하지만, 내 눈에는 그들의 내숭이 다 보인다.
 
  내게 필요한 건 진실 되게 이야기할 수 있고, 서로의 즐거움과 아픔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참된 여자친구다. 무조건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그런 골빈 애들이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애들을 만나왔지만 아직 내가 원하는 이상형은 만나지 못했다.
 
  그 카페를 알게 된 것도 그 골빈 여자들 중 하나인 수진이의 덕이 컸다.
 
  친구들과 어울려 당구를 치고 있을 때 수진이로부터 삐삐가 왔다.
 
  “괜찮은 카페 발견했는데 만날래?”
  “어딘데?”
  “응, 약간 후미진 곳이라 눈에 잘 띄지는 않을 거야. ‘행복 카페’라는 곳인데 생각 보단 조용하고 괜찮더라. 커피 사줄 테니까 만나자.”
 
  마침 친구들과의 당구도 재미없었던 터라 약속 핑계 대고 당구장을 나와 수진이가 가르쳐 준 곳으로 향했다.
 
  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간판이 붙어 있어 찾기에는 시간이 다소 걸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 곳이라 수진이 눈이 삔 모양이라 생각했었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난 마법에 걸리고 말았다.
  어쩌면 카페 안에 울려 퍼지고 있는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이라는 노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수진이가 커피를 홀짝이며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의 옆쪽에 조용하게 앉아있는 긴머리의 아가씨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하마터면 수진이를 지나쳐 그 긴머리 아가씨의 테이블로 다가갈 뻔했다.
 
  “당구 치다 말고 나온 거야?”
  “응, 친구들이 너만 데이트 하냐고 시발시발 하드라. 따라온다는 거 겨우 말리고 나왔어.”
 
  “그냥 데리고 나오지.”
  “흥, 이 바람둥이 아가씨야. 내 친구들이 얼마나 늑대인 줄 알아. 너 정도는 한입 거리도 안돼.”
 
  “그래도 난 늑대에게 먹히는 게 좋더라, 뭐.”
  “별~ 여하튼 게네들 있어봐야 나만 피곤해. 건 그렇고, 여긴 꽤 조용하다. 손님들도 별로 없고.”
 
  “응, 그래서 일부러 너 부른 거야. 너랑 조용하게 데이트하려고.”
 
  카페의 주인이 다가와 메뉴판과 물컵을 내 놓았다. 나는 율무차를 시켰다. 그러자 수진이가 한마디했다.
 
  “율무차는 정력에 안 좋다고 하던데?”
  “괜찮아. 정력 좋아봐야 쓸 여자도 없는데, 뭐.”
  “피식. 왜 없니? 여기 있잖아.”
  수진이는 언제나 그렇게 노골적이었다. 나와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로 지낸 터라 말하는 데에서는 허물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하고는 친구이상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자기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이며, ‘티코 시리즈’를 혼자 깔깔거리며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긴머리 아가씨를 머리 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긴머리 아가씨는 내 뒷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수진이 눈을 피해 곁눈질로 훔쳐 볼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해?”
  ‘테이블을 바꾸자고 할까?’
  “야?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수진이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쩝.’
  “야!”
  “아이고, 왜 소리 지르는 거야? 깜짝 놀랬잖아!”
  “너 딴 여자 생각했지? 나랑 있을 때는 나한테만 신경 쓰라고 했잖아.”
 
  씩씩거리는 수진이를 달래기 위해 영화 관람을 제의했다. 금방 까지도 씩씩거리던 수진이는 영화 관람을 제의하자 금새 얼굴이 환해졌다. 아무래도 내겐 여자를 다루는 본능적인 능력이 있는가 보다.
 
  카페를 나오면서 긴머리 아가씨가 앉아 있던 테이블로 눈을 돌려보았지만 언제 나갔는지 그 테이블은 비어있었다.
 
  그 이후로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그 카페에 자주 갔다. 혹시나 그 긴머리 아가씨를 볼 지 모른다는 설렘에 여자 친구들이 따라오겠다는 것도 억지로 말려가며 혼자 갔다. 하지만 번번이 그 아가씨의 모습은 없었다.
 
  그렇게 한달 동안 그 카페에 들락날락하다 보니, 다른 카페와는 다른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카페의 모서리 부분에 벽이 유리로 된 방이 하나 있고, 그 방안에는 컴퓨터가 몇 대 놓여 있던 것이다. 처음엔 주인이 손님관리를 위해 놓은 것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손님들도 그 컴퓨터를 사용하기에 나 역시 호기심에 컴퓨터 앞에 앉게 되었다.
 
  근데 앉으면 뭐해. 내 컴퓨터 실력이라곤 고작 도스의 ‘dir’정도인데. 남들은 앉아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면서 키득거리기에 나도 앉으면 키득거릴 수 있겠지 했는데, 막상 앉으니 손 댈 수가 없는 거다. 하는 수 없이 ‘dir’만 퍽 한번 때려보고 일어서려는데 주인이 다가오는 거다.
 
  “손님, 컴퓨터 해 보시겠어요?”
  “뭘 할 수 있는데요?”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영화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게임도 할 수 있고요.”
 
  나는 게임을 해보기로 했다. 사실 혼자서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재미없는 일도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이다.
 
  주인은 키보드를 능숙하게 쳤고, 모니터 옆에 달린 스피커에선 ‘빰빠빠빠밤 빰바’라는 음악이 근사하게 흘러 나왔다. 주인은 친절하게도 게임스토리와 게임에 필요한 키 설명까지 해주었다.
 
  “쉬프트 키와 화살표 키를 누르면 걷는 것이고, 위에 화살표 키는 점프를 뛰는 것입니다. 칼을 휘두를 때는 쉬프트 키로...”
 
  컴퓨터는 못해도 오락실에서는 한 때 날리던 몸이라 키는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더군다나 ‘페르시아 왕자’라는 이 게임의 스토리가 마음에 들었다.
 
  재퍼라는 악당 마법사에게 잡힌 사랑하는 공주를 1시간 안에 구한다는 스토리였다. 나는 ‘페르시아 왕자’가 되어서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카페에 흐르는 음악도 어울리게 ‘마법의 성’이 흐르고 있다. 나는 어느 사이엔가 컴퓨터 모니터로 빨려 들어가 페르시아 왕자가 되어 나쁜 마법사 재퍼에게 잡혀 있는 긴머리 아가씨를 구하기 위해 악당들과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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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둠침침한 지하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사랑하는 긴머리 아가씨를 나쁜 마법사 재퍼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나는 불끈 일어나 지하 감옥의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어두운 복도 사이로 간간이 놓여 있는 횃불만이 복도를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오른쪽과 왼쪽 길 중 어느 곳으로 갈까 망설이다 오른쪽 길을 택했다.
 
  좀 가다보니 앞쪽에 악당 한 명이 턱 버티고 서 있는 거다. 그는 나를 보았는지 칼을 꺼내 음흉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나는 허리춤을 만져 보았다. 칼이 없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 없이 저 놈을 이길 수 있을까?
 
  나는 도망치기로 결심하고 왼쪽 길로 줄행랑을 쳤다. 다행히도 악당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왼쪽복도는 다행히 악당은 없었지만, 길이 험난했다. 밑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었고, 위로 올라가는 길도 있었다.
 
  “미로구나.”
  조금 평탄한 길이 나오자 시간도 절약할 겸 뛰어갔다. 갑자기 내가 발을 디뎠던 바닥이 푹 꺼리며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다행이 나의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떨어지는 찰나 함정의 끝을 잡을 수 있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끝도 없는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올라와 다시 앞으로 전진했다. 이제는 평탄한 길이 있어도 절대 뛰어가지 않기로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복도의 끝에 도착했다.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이곳은 막다른 골목인가 보구나. 어떻게 하지? 다시 되돌아가면 칼을 든 악당이 있을 텐데.”
 
  그 때 내 눈에 보인 것은 횃불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칼이었다. 나는 좋아라 그쪽으로 뛰어가다가 하마터면 벼랑으로 떨어질 뻔했다.
 
  “함정이 많은 곳이구나. 조심해야겠는 걸.”
  나는 칼을 집어 허리춤에 차고 아까 악당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악당이 다시 음흉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나 역시 자신만만하게 허리춤의 칼을 빼어 맞섰다. 하지만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비록 칼이 있기는 했지만 곱게 자란 내가 칼을 잘 사용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어설프게 배운 펜싱 실력으로는 악당이 휘두르는 칼을 막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점점 뒤로 밀렸다. 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뒤쪽은 벽이었다. 이렇게 뒤로 밀려가다가는 벽 쪽에 밀리게 된다. 벽 위로 올라가면 악당의 공격을 피할 수는 있겠지만, 벽으로 오르기 위한 준비자세를 취할 수 없음을 알아 차렸다. 준비 자세를 취하는 동안에 악당의 칼이 더 빨리 나의 등을 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나는 악당의 약점을 찾기로 했다.
  악당은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을 때만 칼을 휘두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하기로 했다. 악당이 칼을 휘두르기 위해 칼을 들었을 때, 나는 나의 번쩍이는 칼로 그의 배를 노려 휘둘렀다. 계획은 명중했다. 악당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것이다.
 
  나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의 넘치는 자신감을 조금이나마 소모시키기 위해서인지, 죽어 가는 악당이 말했다.
 
  “너는 결코 이 감옥을 벗어날 수 없을 거다. 이 감옥은 모두 12층으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 나보다 더 강한 칼잡이와 함정이 숨어 있다. 넌 결코...”
 
  마지막 말을 마치지 못했고 악당은 숨을 거두었다.
  “12층에 엄청난 칼잡이와 함정이라...”
  하지만 긴머리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았다. 나는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이층에 있는 두어 명의 악당들을 더 물리치고 났을 때, 나는 극도로 피곤해졌다. 칼싸움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건만 체력이 떨어진 상태라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기어가다시피 앞으로 나아갔을 때 바닥에 푸른 연기가 피어나는 호리병이 바닥에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목도 마르고 해서 의심도 하지 않고 호리병 안에 든 것을 마셔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악당의 칼에 맞은 상처가 낫고 기운이 쏟는 거다. 아마도 그 호리병은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물약인 것 같았다.
 
  조금 더 가니 이번에는 빨간 연기가 피어나는 호리병이 있었다. 좋아라 호리병을 단숨에 마셨다.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오더니 기운이 쭉 빠져 버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이건 체력을 빼앗는 호리병이구나.”
  다행히 조금 앞에 가니 파란 호리병이 있어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나는 기운을 차리고 다시 앞으로 전진전진 했다. 오로지 긴머리 아가씨를 위해서 말이다.
 
  이제 악당들과의 칼싸움에는 자신이 생겼다. 몇 번 휘둘러보니 어려운 것도 없었다. 방어와 공격. 악당이 공격을 시도할 때를 노려 가슴이나 배를 찌르면 백발백중이라는 요령을 터득한 것이다. 하지만 악당보다도 더 무서운 함정이 곳곳에 있었기에 갈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도 까다로운 것은 미로였다. 내 칼에 맞아 죽어 가는 악당들을 협박하고 을러서 겨우 올바른 길을 찾기는 했지만 간혹 바닥이 꺼져버리는 함정이라든가, 바닥에 뚫린 구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송곳들 때문에 죽을 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함정은 바닥과 천장에서 동시에 튀어나오는 작두 같은 칼날이었다. 들어갔다가 나오는 간격이 일정하기 때문에 타이밍만 맞추면 쉽게 통과할 수 있는 함정이기는 했지만 이 곳을 통과할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실수라도 하는 날엔 허리가 싹둑 잘릴지 모르게 때문에.
 
  겨우겨우 지하 감옥을 벗어나자 화려하게 장식된 복도가 나왔다. 이곳 역시 미로로 되어 있었고, 마법사 재퍼가 곳곳에 함정과 칼잡이를 배치해 놓은 듯했다.
 
  악당이 나타나자 가볍게 물리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순간 맞은편에 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내 앞에 내가 서 있기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자세히 보니 복도 한 면이 거울로 가려져 있는 것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멋있는 왕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뿌듯해 하며 거울을 밀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법을 궁리해 보다가 결국 유리를 몸으로 깨 부시기로 했다. 대여섯 걸음 물러나서 거울 쪽으로 뛰어가다가 몸을 날렸다. 거울이 깨지며 거울 속에 있던 내가 거울 밖으로 뛰쳐나왔고, 나는 거울 반대편에 떨어졌다. 거울 속에 나왔던 나는 저 멀리로 사라져 갔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거울에 부딪힐 때 타격이 컸나 보다. 기운이 왜 이렇게 없지.”
 
  악당들이 갈수록 점점 세어졌고, 나는 금새 피로해 졌다. 거의 쓰러질 무렵에 눈앞에 파란 호리병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유리에서 나온 나의 분신이 그 호리병을 낚아채더니 자기가 마시는 것이었다.
 
  “야, 그건 내 꺼야. 이 빌어먹을. 내가 나한테 도움을 주지 않다니. 뭐 이 딴 게 다 있어.”
 
  욕을 퍼부었지만 내 분신은 나를 비웃으며 사라졌다. 열 받을 대로 받은 나는 피로를 무릅쓰고 분신을 쫓았다. 분신은 내가 쫓아오는 것을 알고는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젠장.”
  힘든 전투도 이제 몇 층밖에 남지 않았다.
  악당들과의 전투에서 나는 꽤나 많은 상처를 입었다. 파란 호리병도 이제 눈에 띄지 않았다. 겨우 걸음을 옮길 수 있을 정도의 힘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막다른 길목에 부딪히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되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 앞쪽에서 쇠창살이 내려와 입구를 막아 버린 것이다. 뒤는 막다른 곳, 앞은 쇠창살. 나는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제 늦고 말았다. 쇠창살을 열 수 있는 발판은 내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었다. 나는 그만 자리에 덥석 주저앉고 말았다.
 
  긴머리 아가씨에 대한 그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지금쯤 나쁜 마법사 재퍼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있을 텐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긴머리 아가씨를 구하지 못한 내 자신을 원망했다.
 
  그때였다. 어디서 왔는지 생쥐가 쇠창살 밖에서 서성이는 것이다. 그러더니 쇠창살을 여는 발판으로 갔다. 순간 쇠창살이 드르륵하면서 열렸다.
 
  나는 생쥐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비록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내겐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생쥐의 목에 걸려있는 리본을 발견했다. 내가 다가가 리본을 풀어보니 리본에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행운이 있기를 바래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며, 긴머리 아가씨가.”
 
  나는 기운이 솟아났다. 긴머리 아가씨는 나를 위해 이 생쥐를 보내 준 것이다. 나의 생명을 구해준 긴머리 아가씨, 반드시 내가 구해주겠습니다!
 
  나는 리본을 칼자루에 묻어놓고 아까보다 더욱 기운차게 공주가 갇혀 있는 방으로 향하였다. 몇 명의 악당들이 내 앞으로 가로막았지만 정의의 칼에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이제 마지막 층에 도달했다. 꽤나 높은 벼랑을 오르며 나는 긴머리 아가씨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보고만 싶었다.
 
  벼랑의 어느 정도 올랐을까 내 앞에 내 분신이 서있는 것이 아닌가.
 
  “이 녀석 잘 됐다. 감히 내가 먹을 파란 호리병을 먹었겠다.”
  나는 칼을 꺼내어 들었다. 분신 역시 칼을 꺼내었다. 나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내 분신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다행히 분신의 칼 휘두르는 솜씨는 악당들보다 못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히 내 칼이 분신의 가슴을 찔렀는데도 내 가슴이 아픈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분신의 배를 찔렀다. 어김없이 내 배가 아파 왔다.
 
  “이거 어떻게 된 거지? 왜 내가 아픈 거야?”
  나는 내 분신을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칼을 들고 있는 내 분신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 녀석 왜 저러지? 아파서 우는 건가?”
  아파서 우는 것 같지가 않았다. 내 분신의 눈물을 보니 왠지 불쌍해 보였다. 나 역시 내 분신을 더 이상 칼로 찌르기도 싫고 해서 칼을 거두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분신 역시 칼을 거두는 것이다.
 
  싸울 의사를 포기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나는 분신을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런데 분신 역시 나에게로 오는 거다. 분신이 바로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분신이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마법사 재퍼가 마법을 걸어 놓은 거울을 깨뜨렸을 때 나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 분신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때 기운이 없었던 거구나.’
  나는 분신을 와락 껴안았다. 순간 분신도 나를 껴안았고 분신과 나는 하나가 되었다. 새로운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좋아, 재퍼. 감히 나의 긴머리 아가씨를 납치하고, 내 분신마저 슬프게 했다 이거지. 기다려라 내가 간다.”
 
  나는 용기 있게 위로 올라갔다.
  수십 길 낭떠러지 앞에 도착하자 그 용기도 주춤했다. 더 이상 갈 길이 없는데 앞은 수십 길 낭떠러지였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하지?”
  혼자 중얼거리는데 어디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내 몸 속으로 들어온 분신이 말하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분신이 말했다.
 
  ‘용기를 가져. 저건 허상이야. 뛰어.’
  뛰라고? 밑이 낭떠러지인데 여길 뛰란 말이야? 미쳤나 보군.
  하지만 갈 길은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분신의 말은... 나는 분신을 믿기로 했다. 나는 눈을 감고 낭떠러지를 향해 힘껏 뛰어 올랐다.
 
  눈을 떴을 때, 놀랍게도 내 발 밑은 낭떠러지였다. 하지만 나는 공중에 뜬 그대로였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다리였구나.”
  나는 분신에게 감사했다. 진정한 용기는 이런 것일까? 믿는다는 것!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천장이 무너지면서 파편이 나에게로 쏟아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긴머리 아가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수십 길 낭떠러지 위에 드리워진 다리를 건널 때 멀리 시꺼먼 옷을 입은 악당이 모습을 들어냈다.
 
  “여기까지 오다니 대단하구나, 애송이.”
  “재퍼? 나쁜 놈! 긴머리 아가씨를 내 놓아라!”
  “후후. 나를 무찌르기 전에는 어림도 없을 걸.”
  “나쁜...”
  나는 칼을 휘둘러 재퍼에게 공격을 가했다. 재퍼 역시 악당 두목답게 칼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그것은 재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뒤로 물러나 체력을 회복시키려 했다.
 
  “후후, 그 따위 실력으로 나에게 달려들다니.”
  “긴머리 아가씨를 내 놓아...”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를 말했다. 이미 내 체력은 다했던 것이다. 나는 칼자루에 묶어놓은 리본을 바라봤다. 긴머리 아가씨가 적어놓은 문구가 보였다.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며.”
  그래, 나에게는 긴머리 아가씨가 있어. 너 따위가 가로막을 순 없지. 긴머리 아가씨가 나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야앗!”
  나는 온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재퍼가 칼로 막았다. 재퍼의 칼이 두 동강이 났다. 나의 칼은 재퍼의 가슴에 명중했다.
 
  “이럴 수가. 애송이가...”
  재퍼는 수십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악의 최후가 그러하듯 재퍼 역시 그렇게 죽고 만 것이다.
 
  나는 그리운 긴머리 아가씨가 기다리는 방으로 향했다.
  문으로 들어서니 아름다운 긴머리 아가씨가 획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그 모습. 언제나 그립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달려가 그녀를 품안에 가득 앉았다.
 
  “와 주셨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울먹이다시피 했다.
  “살아서 돌아와 주셨군요. 고마워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껴안았던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보았다. 카페에 처음 들어왔을 때 보았던 그녀의 얼굴이었다. 나는 기뻤다. 이로서 해피엔딩이 된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를 껴안았다.
 
  공주의 품을 따스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영원히 내 가슴속에 품고 싶었다. 나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긴머리의 아가씨가 내 눈앞에 있었다. 무척이나 익은 얼굴이다. 나는 한동안 그 아가씨가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너 뭐하니?”
  그 긴머리의 아가씨는 어느 사이엔가 수진이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수진이가 항상 하고 다니던 파마머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수진이는 긴머리를 한 채 내 눈앞에 있었던 거다.
 
  “히히, 내 머리 어때? 멋있니? 파마 풀었어. 긴머리가 나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예쁜데.”
  나는 흐리멍텅한 목소리가 말했다. 정말이지 그 때처럼 수진이가 예뻐 보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내가 구한 공주는 애초부터 수진이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수진이가 틀림없어. 그녀가 긴머리 아가씨야.
 
  “이그 이 바보야! 컴퓨터 게임 하다가 잠자는 사람이 어딨니.”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페르시아 왕자’라는 게임을 하면서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구나 라고 생각할 때 힐끔 모니터를 보니 왕자와 공주가 서로 껴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수진이가 그 장면을 보더니 한마디했다.
  “이야, 너 대단하다. 저 게임 나도 예전에 해 보았는데 꽤 어렵던데. 어떻게 끝까지 갔어?”
 
  “그거? 공주를 구하겠다는 일념과 믿음 때문이지. 하하.”
  “피이. 싱겁긴. 자, 가자. 내가 저녁 살께.”
  “응. 그런데 여긴 어떻게 왔어?”
  “그냥. 심심해서 커피나 마실까 하고 왔는데, 네가 컴퓨터 앞에서 자고 있잖아.”
 
  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카페를 나올 때 ‘마법의 성’이 흘러나왔다. 수진이가 말했다.
  “저 노래 참 좋지?”
  나는 대답 대신 가사를 흥얼거렸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마법의 성과도 같은 카페를 나오면서 나는 수진이의 손을 꼭 잡았다. 목숨을 다해 구한 공주를 다시 빼앗기기 싫었기에...
 
 
  에필로그
 
  “있지 건우야. 실은 너 몰래 사귀는 남자 있었다. 미팅으로 만났는데 너무 멋있는 거야. 너 하고는 더 이상 비전이 없을 거 같아서 한동안 만났어. 그런데 네가 컴퓨터 게임 하다가 잠자던 날에 그 남자가 나한테 정식으로 사귀자고 하는 거 있지? 내 입에서 그래요 라는 말이 나올 때 갑자기 네 얼굴이 떠오르더라. 그래서 싫다고 말하고는 그 자릴 박차고 나왔어. 그리고 그 카페에 간 거야. 그런데 웃긴 건 그 남자의 별명이야. 그 별명이 뭔지 아니? 마법사 재퍼래. 정말 웃기는 별명이지? 킥킥.”
 
  Fin...
 
  95.01.-- 원고시작
  95.01.-- 원고마침
  99.08.03 원고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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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올리고 나서
 
  묘하게도 ‘마법의 성’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며 91년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컴퓨터 게임인 ‘페르시아 왕자’가 떠오른다. ‘마법의 성’을 작사했던 사람도 이 게임을 하다가 곡을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편의 소설로 완성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조금은 바람둥이 스타일의 건우라는 남자는 친구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수진이를 만나기 위해 행복 카페를 찾는다. 그리고 긴머리의 아가씨에게 한 눈에 반해 꿈속에서조차 그녀를 찾기 위해 맹렬하게 싸우지만, 자신이 구하려 했던 긴머리 아가씨는 결국 수진이였다는 짧은 스토리가 어쩌면 ‘마법의 성’이란 노래의 이미지를 망쳤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허물없이 지내는 이성 친구를 좀더 가까운 사이로 만드는데 ‘마법의 성’과 ‘페르시아 왕자’가 한 몫을 했다면 나는 더 바랄 나위 없이 기쁘다.
 
  여러분 곁에 친한 이성친구가 있다면 꿈속에서 그녀 또는 그를 구하는 멋있는 사람이 되어 보기 바란다. 어쩜 또 아는가. 구해준 대가로 여러분에게 달콤한 키스를 선사해 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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